인류대멸종 : 1. 개인의 멸종
2022.04.01. - 2022.04.20
기신
김정훈
Schreiben
부산 아이테르
[인류 대멸종 : 1. 개인의 멸종]은 아이테르의 인류대멸종 기획전시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이다.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가치, 기술, 지식, 규범들을 학습하고 끝내 획일화되어 개인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재 세상을 기신, 김정훈, Schreiben 3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해석으로 아이테르 전시공간을 채운다.
'기신' 작가는 멸종되고 있는 개인의 모습을 상상력을 더한 일러스트로 작업하였다. 작가는 특유의 살결과 근육의 질감을 표현하는 붉은 선들로 이번 작품을 완성하였다. 작가의 그림 속에는 피사체들은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는 물건과 함께 등장하게 되는데, 이 물건이 어떤 상상을 통해 피사체 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며 작가의 전시에 깊이 빠지게 된다.
'김정훈' 작가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고 영감을 얻어 대추가 익어가는 현상을 사회화에 빗대 표현한다. 우리들이 시련을 받으면서 모두 비슷해져 가는 모습을 대추 한 알 시와 대추 프린팅, 모형을 전시하였고 인간의 형상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설치작품 'no/achromatic'을 통해 마네킹 두 개에 각각 개성인과 몰개성인을 표현하여 대비되는 이미지 속에서 개인의 존재성 대하여 고민하게 한다.
'Schreiben' 작가는 멸종된 개인의 개성을 전시공간에 살려낸다. 대부분의 인류가 내보이지 못하고 숨기는 것을 작품으로 선보이며 서브컬처를 무시하는 주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비주류 장르에서 탄생한 수준 높은 설치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비주류 장르가 주류보다 못하다."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그리고 벽에 빼곡하게 붙어있는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가져야할 선택기준은 장르가 아니라 개인의 진심과 시간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개인의 멸종 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보고왔다. 즉 인류 대멸종. 요즘 몇몇 전시를 가보면 지구종말, 멸종, 환경파괴와 관련된 주제들이 꽤 많은데, 이 전시 주제 역시 '인류 대멸종'이라고 하기에 환경과 관련한 멸종을 얘기하는 것일까? 했는데 그건 아니고 개인의 개성과 특색이 사라진다는 의미로써의 멸종이었다.
회화부터 설치미술까지 두루 전시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설치미술 작품이 제일 임팩트 있게 다가온 부분이 있다. 물론 저 위에 마치 사이보그를 형상화 한것 같은 회화 그림도 내 취향저격이긴 했는데 설치미술 작품이 아무래도 압도적 임팩트가 있지 않았나. 이 무인 전시관을 방문한것은 이번이 아마도 세번째인데 처음 방문 했을때는 화장실 문이 닫혀있었다. 물론 열어보고픈 호기심도 꽤 들었었지만 문닫힌 방은 열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으므로 허튼 짓거리는 삼가하고 조용히 관람하고 왔었다. 무튼 이번에는 화장실 공간이 개방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대추 한 알' 이라는 시에 영감을 받고 만들어진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대추가 익어가는 현상을 사회에 빗대어 표현했다는데, 과연 그건 익어가는건가 곪아 가는건가. 아마도 후자의 느낌이 좀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당신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보상 : 승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잃음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꽤나 인상적이다. 당신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그러나 보상은 승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잃는 것. 여기서 의미하는 '승리'라는건 사회의 척박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걸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승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잃는다고 한다. 즉 '생존'은 하였으나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은 모두 앗아가버린다는 참혹한 결말을 뜻하는 것 같다. 치열한 현대 사회의 경쟁속에서 그저 부지런한 일꾼으로써 '존버' 한다는것은 결국 전속력으로 색깔을 잃어간다는 의미를 반영하는 것 아닐까.
그럼 결국 부지런히 존버 할것인가 VS 존버를 거부하고 색깔을 잃지 않는 노력을 할 것인가 이 두가지 줄다리기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것이 평범한 현대사회인의, 또는 젊은이들의 고민인것이다. 우스갯 소리로, 종종 하루하루 썩어간다는 기분이 드는게 정말 하루이틀 일이 아니므로 평범한 직장인으로써는 저 고민과 갈등이 굉장히 크게 와닿는 편이다. 뭔가 '획일화' 되어 간다는 기분이 두려워 계속해서 새로운것을 시도해보고 적극적으로 생산적인 활동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이나 큰 틀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도돌이표 같은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것이 분명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또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이 계속되는 갈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찾고자 하고 지키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굉장히 숭고하게마저 느껴진다. 누군가는 그런 노력을 우습게 여기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차가운 시선들 사이에서 굳건히 내 색깔을 지키고자 한다는게 그 얼마나 대단한 노력인가.
작품중에 코로나 마스크로 특정 신체부위를 가린 그림이 있었다. '마스크'라는 용도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꽤나 사회적으로 엄중한 책임감을 갖고 많은 세계인들이 2-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스크를 내내 쓰고 생활을 하였다. 물론 그 목적 자체는 '방역'이라는 특수한 의미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마스크를 쓰는 행위 뿐만 아니라 활동영역과 시간까지, 점점 개인의 사생활 깊숙히 통제가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야 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가지면서 그 목적이 물론 이로운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유'가 통제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마스크'의 특수한 목적성을 떠나서 그런 통제된 생활 패턴을 살면서 똑같은, 획일화된 일상을 살아가는게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마스크 착용을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획일화 된다는것, 똑같아진다는것을 굉장히 불편해하고 꺼리는 한 인간으로써 이 사회에서의 '승리'는 결국 색깔을 잃고 다양성을 잃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내가 출근할때 집을 나가기 전, 옷걸이에 내 '자아'를 살짝 벗어놓고 나가야 한다. 라는 것인데 내 색깔이 강하면 보통의 직장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다지 그것이 장점으로 활용되기보다 유난스럽고 예민하고 튀는 인간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근전에는 자아를 살짝 벗어놓고 나간다.' 라는 생각으로 몇년째 그 생활을 하고있지만 어떤 날은 여전히 그 행위(?) 자체가 꽤나 울적한 기분으로 다가올 때가 종종 있다. 흔히 말하는 '현타'온다는 감정인데, 어쩌면 나는 이 '현타'스러운 감정과 계속해서 싸우는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품중에 서브컬쳐와 비주류 문화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비주류'적인 취향과 그 문화에 대한 관심, 애정 그 자체도 종종 무시되는 현상이 여전히 알게모르게 언제나 '획일성'을 강요받고 있는 모습들 중의 일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래 '김정훈' 작가의 말 중에서 마치 우리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듯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이 있어 그 일부를 발췌하며 마무리 해본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아를 가진 인류는 멸종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굴레 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정해준 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 각자의 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 되려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내봅시다. 멋지게 같이 해내봅시다.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다른 숨을 쉬니까."
작가의 말
기신
모두가 탄생을 기점으로 저마다의 시선과 기준을 가지며 바라보고 보인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환경 및 상황 속에 맞닿고 노출이 되어 자신의 모난 기준과 의도를 들켜버리고 만다. 의도치 않게 보여버린 인물들의 얼굴엔 눈가에 드리운 선들과 흔들리며 퍼져가는 동공으로 마주하고 있다. 개성이 멸종되어 보여버릴 가치를 잃어버린 지금, 인물들의 외면으로 노출되는 모습들은 굴레에 벗어나 이전과 다른 모습들인가, 그마저도 몰개성화된 일환인가.
사람들은 시선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만일에 시선을 대비하고 가꾸어간다. 애석하게도 노출이 될 시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들로 마주하곤 하는데, 의도를 가지고 계획을 체계화할수록 떳떳함의 기준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치밀함보단 자연스러운, 극단적인 날것의 환경 속에 노출된 멋스러운 캐릭터들로 상황을 대변함으로써, 만일을 대비하는 이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 자신이 우려한 모습들의 의외로 나쁘지 않았음을.
김정훈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굉장히 곤란해집니다. 나에 대해 밝히는 것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 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뭘 하고 어떤 집에 살고 옷은 어떤 것을 입고 차는 뭐고 돈이 많고 적고..... 이런 것에 있어서는 굉장히 청산유수의 달변가가 됩니다.
정작 나 자신은 잘 모르면서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빈 껍데기인 상태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자가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교육이나 tv속의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들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그게 진리인 것 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며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매도하고 비난합니다. 또 유행에 편승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흔히 말하는 철지난 것 같은 옷차람이나 밈(meme)등을 사용하면 조롱을 당하죠. 참 비참한 현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우리는 점점 몰개성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아를 가진 인류는 멸종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굴레 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정해준 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 각자의 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내적과 외적으로 모두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세상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 되려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내봅시다. 멋지게 같이 해내봅시다.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다른 숨을 쉬니까.
Schreiben
저는 퍼리입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퍼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동물 인간을 주제로 하는 장르입니다. 서브컬쳐 중에서도 꽤나 마이너한 장르이지요. 제가 왜 퍼리를 주제로 작업하는지를 말씀드리면, 사람 몸에 동물 머리가 달린 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동물만이 가지는 야성미나 귀여움에, 사람만이 가지는 복잡한 서사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환상적인 조합이지요! 아쉬운 건, 퍼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 음지로 숨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퍼리뿐만 아니겠지요. 아름다운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주지 않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내 것은 대중문화가 아니야, 하면서 숨기기만 하면 대중은 당신의 그것이 뭔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그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진부한 것들뿐일 터이고, 결국 진부한 그것들만이 주류가 됩니다. 새롭고 재미있는 건 하나도 없는 세상의 탄생이지요. 저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를 당당하게 내보이겠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것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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