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9/01_1.html
"때로는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타인과의 유대감"
나는 가끔씩 동아신춘문예 사이트에 접속해서 수상작들을 읽어보는 취미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제 막 새로 발굴된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뭔가 더 신선한 느낌에 자극을 받기도 하고 그 열정/패기가 서려있는 작품들을 모니터로 간접적으로 경험하는것이 내겐 꽤 흥미롭고 즐거운가보다. 뭔가 어디에도 없는 순수함의 날것, 결정체들을 뭐든 읽고 접하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차오를 때 넌지시 이곳에 들어와보게 된다. 어쨌든 내가 읽어본 작품은 2019년 중편소설 당선작 '오즈'라는 작품이었다.
어딘가 사연이 짙어 보이는 젊은 여자 주인공 '하라'가 등장하고 그 주인공이 독거노인 할머니인 '오즈'씨와 함께 살아가게 되면서 겪게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남기고 떠난 빚더미 때문에 살곳이 애매해진 주인공은 구청에서 주관하는 주거사업의 세입자로 참여하게 된다. 독거노인들의 남는 방을 청년들에게 저렴한 시세로 내주는 식인데 그곳에서 아주 깐깐하고 평소 사람과 거의 왕래하지도, 쉽사리 말을 섞지도 않는 걸로 유명했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런 할머니가 유일하게 외출을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오즈의 마법사'가 극장에 걸릴 때 이다. 그때마다 늘 극장을 찾아온다고 해서 '오즈'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타인과 가족보다 끈끈한 유대관계를 그렸던 몇몇 영화가 생각이 났다. 바로 영화 '가족의 탄생'이 그러했고 '죽여주는 여자'와 같은 작품이 내게는 그랬다. 이 작품 역시도 철저히 서로 '이익관계'로 엮여 만나게 된 두 인물이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보다 서로의 상처를 묵묵히 이해하고 보듬는, 진한 우정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옛날에 어디서 들은 말인데 가족도 '남'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냉혈한 같은 소린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말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는 사람으로써 살면서 종종 피 섞인 가족들이 어쩌면 타인보다 못한 경우들을 흔히 보고 듣고 경험했다. 예전에 내 지인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기도 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가족은 똥구멍 같은거다, 드러워도 절대 못떼내. 그냥 그게 가족이다."
너무나 명쾌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족관계가 오히려 더 곤욕스러울 때도 있다. 만날때마다 트러블이 잦거나 나와 잘 맞지 않는 타인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자주 안 만나면 되고, 연락하지 않으면 끝나는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떼내어 버릴수도, 쉽사리 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어쨌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타인인 두 사람이 '가족'보다 더 깊은 이해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게 되는 관계를 보면서 과연 진짜 가족의 의미가 어떤건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의 낯선 것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방식들이, 어쩌면 서로가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늘 실수 연발하고 쉽게 상처를 주게되는 피 섞인 '가족'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건강하고 애틋한 정서적 교류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하라'와 오즈 할머니는 각자 개인만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실 '상처', '트라우마'와 같은 단어들은 영화나 문학에 수시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작품이든 이야기 속엔 갈등을 빚는 구조가 있고 그 갈등은 상처나 트라우마로 부터 시작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캐릭터를 깊게 이해함에 있어서 '상처'는 중요한 단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려 심각한 애정결핍을 겪어온 '하라'와 일본군 혹은 일본인으로부터 학대를 당한것으로 추정되는 '오즈' 할머니. 거기다 할머니는 인공 심장 박동기 삽입술을 받은 병력이 있다. 그 둘은 '타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하고자 한다. 할머니는 일본어로 쿠소(똥,대변)라고 몸에 새겨진 문신이 있었다. 그 흉측한 문신을 가리기 위해 마침 취미로 몸에 타투 새기는 작업을 공부하고 있던 '하라'에게 자기 몸에도 예쁜 커버업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하라'는 평소 생화 꽃을 압축하여 수집하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예쁜 꽃을 새겨드리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딱딱하고 소통이 없었던 둘 사이의 허물이 조금씩 벗겨지고 괜히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는 모습이 무심한듯 하지만 '츤데레'같은 모습이 비춰져 애틋해 보였다.
사실 소설 속 하라의 과거 기억 회상 중, 남동생의 죽음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그녀의 가해 여부가 확실치 않고 희미했다. 그러나 예상해보건데 '하라'가 형사로부터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던 경험과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봤을 때 여주인공 '하라'가 남동생의 죽음에 직접적인 가해자 일수도 있다는 소름끼치는 가능성을 어느정도 열어두고 있다고 본다. 아마도 그 죄책감과 본인에 대한 혐오로 허벅지에 수 차례 자해를 시도 해왔지 않았을까. 그래서 '합리적'으로 자해 할 수 있는,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타투'라는 것을 자연스레 시작해보게 되었다는 그녀의 얘기가 어느정도 그 무서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어찌됐든, 생판 남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가족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고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감정들을 공유하면서 담담하게 풀어가는 이야기가 조용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오즈'라는 할머니 캐릭터가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진한 이미지에 어딘가 강해보이는 인상. 눈빛은 쉽게 사람들에게 정을 내줄 것 같지 않은 차가운 느낌에 여름에도 터틀넥 옷으로 몸을 가리고 다니며 꽤나 야위고 마른 몸의 할머니가 캐릭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할머니가 애착하는 영화로 '오즈의 마법사'가 나온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뭔가 신비로운 환상의 마법 세계를 그리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오즈'라는 별명을 가진 할머니. 극장 개관 이래로 줄 곧 오즈의 마법사를 보러 빠짐없이 찾아간 할머니가 이 영화를 본 횟수만 해도 수십, 수백번이 넘을텐데 불구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스크린을 응시하며 집중하던 할머니에게 '오즈의 마법사'라는 영화는 어떤 의미였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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