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한민국 141분
개봉 2023.11.22.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 군사반란 발생 그날,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26일 이후, 서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도 잠시... 더보기

 
 
 
영화리뷰 처음으로 영화 카테고리가 아닌, 인간/심리/사회 카테고리에 이 포스팅을 적는다. 이 리뷰에서는 영화의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설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인간상' 이라는 초점에 맞춰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째서 악인들은 죽기전까지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진정한 어른들은 고통속에 살다 단명하는 것일까. 이 영화가 내게 던져 준 가장 첫번째 아이러니한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도 나 뿐만이 아니라 관람한 모든 관객들이 그런 탄식을 했으리라. 역시나 이번에도 느낀 불변의 진실은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매우 쉽고 빠르게 일어나지만 정직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심지어 타락한 인간들을 상대로 꿋꿋하게 정직함을 지켜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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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인간학연구소 - 니체의 선물 (feat:세상에 사기꾼이 많은 이유)

https://youtu.be/wY4bW63lplA " 이상한 건 걔들이 아니라, 나였다. " - 지성은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 주된 힘을 '위장'(변장)을 통해 펼친다. 최근 다소 충격적인 영상을 접했다. 평소에 '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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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가 블로그에 '니체의 선물'이라는 게시글을 올린적이 있는데 그 게시글의 내용이 문득 생각난다. 인간은 원래 그러하고, 그렇게 살아왔기에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었다 라는 것.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당신이라는 인간이 어쩌면 돌연변이 일 수도 있다. 라는 내용이었다. 타락은 인간의 본능이고 누군가를 해하고 꾀하는 것도 결국 근본적인 생존의 본능과 전략이라는 얘기였는데 그 사상은 내게 꽤나 큰 신선한 충격감을 전해줬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본능을 거부하고 참된 어른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야 말고 성숙한 고지능자에 가까운 인간형이 아니겠는가. 라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그것이 본능이기에, (말하자면 성악설이라 불릴수 있는)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라는 얘기는 적어도 아닐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지능자, 현명한자, 성숙한자가 되는것이 당연히 타락하고 교양 떨어지며 치졸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되버리는 것보다 당연히 어려운게 마땅하다. 물론 타고나는 성품의 차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인간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누구나 인생의 기로해서 나쁜선택과 좋은선택 사이에서 고민을 해봤을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타락하고 치졸한 인간이라는 것은 약간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좀 더 적정한 예시로 들어 보자면 '포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성숙한 자가 되는 것 보다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 후자가 훨씬 간단하고 쉽고 빠르다. 그렇기에 소신을 지키고 정직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참 어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참 어른들은 언제나 그렇듯 치졸한 무리들로부터 늘 공격받기 일쑤다. 그들이 그렇게 정직하게 그 자체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게끔 가만히 두지 않는다. 이것이 질투인지 뭔지 정확히 잘 알수 없지만 질투심과 더불어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과 정 반대인 누군가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가 아닐까 싶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가지고는 있지만 절대 쉽게 넘어오지 않는 그들에 대한 어떤 분노와 열등감이지 않을까. 쉽게 말하면 자신과 다르게 반듯하고 우월한 멋진 누군가를 보면서 이유없이 증오하고 괴롭히고 싶은 수작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도 '전두광'이라는 캐릭터가 '이태신'에게 슬쩍 자신과 같은 배를 탈 의향이 있는지를 떠보는 장면이 나온다. 즉 "같은 편 만들기"를 시도 해 보지만 역시나 이태신에게는 어림도 없는 제안이었고 "육군은 모두가 같은 편입니다."라는 말만 돌아 올 뿐이었다. 이 장면에서 전두광의 표정을 보면 자신과 완전히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그 이질감, 혐오감, 분노 등등 이런 모든 감정들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짓는걸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모두가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이므로, 언급하자면 슬프게도 악의 무리가 승리하는 이야기다. 흔히 영화 드라마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해피엔딩들을 자주 보지만 이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 마음 아프게도 정의가 악의 무리를 소탕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악한 인간이 권력을 쥐거나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 중 하나인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스트가 사회의 우두머리 집단에 많이 분포해 있다는 심리학적인 분석이 꽤나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정리해보자면 아마도 아래와 같지 않을까.
 


 
 
1. 이타심 결여 (이기주의)
2. 목표를 향해 물불 가리지 않는 무모함과 추진력
(목표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나쁜행동 일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3.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결여

4. 현저히 떨어지는 도덕성과 죄책감에 대한 감각

5. 근본없는 자신감 혹은 자기도취 (즉 자기객관화 어려움)
 


 
 
일단 기본적으로 그들은 이타심이 없으므로 본인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인간으로써 이타심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많은 것들을 동시에 고려하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피해를 보지는 않을지, 나의 행동과 결정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객관화를 수시로 시도하지만 반대로 악인들은 그런 의의를 따지지도 않을 뿐더러 애시당초 목표 설정 자체에도 결이 다르다. 흔히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소유욕, 권력욕, 물욕 등등 모든 쾌락에 대한 욕구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뿐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그리고 자신의 목표가 어떤 의의가 있고 어떤 이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사회에 어떤것을 이바지 할 수 있는지 등등 이타적인 목표 설정은 조금도 없기 때문에 주변 환경과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내게 도움이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조금 설득하면 넘어올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렇게 자기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로 조직을 구성할 뿐. 우스운것은 그렇게 하고나서도 그런 악인들의 조직은 늘 내부 갈등이 일어나기 일쑤라는 거다.  (그들끼리도 서로 언제 등쳐먹을지 모르는 얄팍한 관계와 의리). 애초에 그들이 형성하는 인간관계라는것이 그저 힘의 서열과 정치질 그 뿐이니 말이다.
 
 
 

 
 
 
어느 세상이든 선과 악은 늘 공존하고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도 완벽한 선, 완벽한 악은 없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성숙하고 참된 어른이란것은 결국 어떠한 현혹 속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팍팍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점점 더 많은 '포기현상'이 나타날것이다. 아까 말했듯 성숙하고 참된 어른이 되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 길은 꽤나 많은 노력과 인내심과 성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악인은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과 악 중간에 있는 평범한 대중들이다. 힘의 방향에 따라 충분히 어느쪽으로든 설득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사회가 팍팍할 수록 더욱 더 범죄나 혐오, 사기가 판을 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기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악인이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 팍팍한 사회는 우리를 더욱 이기적으로 만들고, 더욱 더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물불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결국 이타심, 양심, 도덕 이런것들을 죄다 벗어던지고 당장의 '나의 이익'에만 불을 켜게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옹호하고자 하는것은 절대 아니다. 어찌됐건 범죄는 범죄이고 악인은 악인이므로 모든 나쁜 행위들에 그 어떤 이유와 합리화도 적용될 수 없다. 단지, 팍팍한 사회는 내가 아까 말한 선과 악의 그 중간에 있는 대중들을 좀 더 악으로 몰아가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세상이 어떤 모습이든지간에 나 자신은 절제력을 잃지 않는 '선'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그만큼 싸워나가야 할 적대적인 세력이 늘 도처에 깔려있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다. 적대적인 세력이라는것이 이 영화에서 처럼 뭐 대단한 적군을 뜻하는게 아니라,  이것은 그냥 우리의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가족, 친구, 직장 이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쉽게 내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런 외부 환경으로부터 나쁜 영향력을 받지 않고 건강한 마인드셋을 한다는 것이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속에서는 정말로 더 쉽지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인이 될 것인가? 그렇게 쉽게 나 자신을 놓아버리고 형편없는 수준의 인간이 될 것인가? 라고 물음을 던졌을 때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통제력을 잃지 않고 타인을 공감하면서 살아가다보면 훨씬 아름답고 큰 세상이 되어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이타심 따위도 너무 거창하다면 그냥 어찌됐건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마인드셋은 "남에게 피해주지말자"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https://youtu.be/wY4bW63lplA

 

 

 


 

" 이상한 건 걔들이 아니라, 나였다. "

- 지성은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 주된 힘을 '위장'(변장)을 통해 펼친다.

 

 

 

최근 다소 충격적인 영상을 접했다. 평소에 '길연구소'님 유튜브를 가끔 보는  편인데 약간 MBTI 과몰입러 이기도하고 여러모로 심리쪽으로 많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루시는 것 같아서 평소 구독하는 채널 중의 하나이다. 근데 '니체의 선물'이라고 올라온 이 영상은 이 이 포스팅의 제목처럼 '진실'이 너무도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영상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보통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 사람들은 되려 대체 이제와서 이게 왜 놀라워?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진실'과 '솔직함'에 굉장히 예민하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상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나 같지 않다." 라는 진실을 어서 깨달아야 한다.

 

 

'진실'과 '솔직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든 또는 어떤 상황에서든 무엇이 맞고 틀린가?에 대한 추구이면서 이것은 어쩌면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행동일 수도 있다. 즉 진정성, 무엇이 진짜인가를 찾아 헤매고 갈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관계에서 '솔직함'과 '진실성'이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실 추구를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이상으로 즉,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진실을 쫓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는 당신이 사실은 '별종'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아마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즉 쉽게 말해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생존 본능은 진실 추구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남을 속이는 행위에 더 가깝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단순 성선설, 성악설 같은 것을 말한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두뇌는 생존을 위해서 각자의 '전략'을 꾸려 살아가고 그것은 다른말로 트릭이라고도 하지만 결국 '속이기' 행위 인 것이다. 즉 생존은 = 속임수. 전략이라는 그럴싸한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곧 속임수인 것이다. 스포츠로 얘기하면 가장 이해가 쉽다. 가끔 최하위 팀이 최상위 팀을 꺾고 우승해버린다던가, 어떤 반전을 뒤집는 경기들을 보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트릭', '전략'이 제대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축구든 복싱이든 마찬가지로 내가 이렇게 공격 할 것 '처럼' 해놓고 사실 다른 방식으로 교묘하게 상대를 속여서 득점을 따내고 이런 모든 것들이 이기기 위한 속임수이며 전략이고 그것은 반칙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당연히 인간사회에도 적용되며, 이것은 가족관계든 친구든 연인이든 할 것 없이 그냥 생존 본능으로써 우리는 상대를 속이고, 그럼으로써 나를 이 사회안의 인간 생태계에서 더 '생존'에 유리한 위치에 자신을 놓으려는 행위들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흔이 NT들에게 또는 TJ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진실'과 '팩트'가 무엇인가에 굉장히 집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상황을 예로들어, 사람들은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했을 때 대부분 불쾌감을 느낀다. 근데 자세히 살펴보면 '진실되지 않음'에 대한 불쾌감도 물론 있겠지만 사실 그 보다는 그 거짓으로 인해 내가 볼 '피해'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진실되지 않은 사실이 내게 전혀 불쾌감을 주지 않고 되려 이득을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아마 그 '거짓'을 별로 신경쓰지도,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놀랍지 않은가? 심지어 설사 '진실'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내게 불쾌감을 가져다 준다면? 또는 해가 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에 적대적이게 된다. 이게 인간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 인간성 따위를 논하는 이야기라기 보다, 그냥 인간의 두뇌가 애초에 진실 추구를 하기 위해 여지껏 발달되온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이며 우리는 '속이기'와 같은 전략을 머릿속으로 잘 꾸려왔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뇌는 바로 그런 것들을 잘 하기 위해서 발달되어 온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처음부터 이런 짓(속임수)을 하기 위한 것이고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진리 탐구용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은 본디 진실을 탐구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원래는 다른 이유, 즉 천적이나 포식자를 속인다던가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런 실질적인 목적에는 관심도 없고 엉뚱하게도 나의 궁금증,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해소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즉 결국 '변종'이라는 것이다. "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인간 두뇌의 실질적인 원래 목적, 천적이나 포식자를 속여서 내가 생존하기 위한 것에 대한 고민, 몰두보다 나의 궁금증 해소, 진실 추구 따위에 많은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혹시 나 자신인 것 같다면...  바로 당신이 변종인간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많은 NT인들은 이 사실이 굉장히 실망스럽고 인간 세상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며 모든것들이  갑자기 의심스러우며 죄다 회색빛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진실을 쫓고자 하는 당신들은 사실은 굉장히 '별종'에 가깝고, 남을 속이고 속임 당하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가는 저 인간들이 실질적으로 본래의 뇌의 역할과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들을 하며 사아가는 정상적 인간들이라는 사실이 아주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신도 당장 당신의 보다 나은 생존을 위해서 얼른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그렇게 하십시오! 따위의 말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과한 행위는 결국 범죄가 되고 그런 범죄들이 사실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라는 이유로 그것을 '맞다'라고 부추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일상적인 미묘한 행위들은 사실 인간의 생존 본능에 기반한다 라는 팩트 자체를 전달하려는 것 뿐인것이다. 그래서 이 일상적인 '속이기' 행위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이토록 '진실'에 목을 매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순진하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침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솔직함'과 '진실'추구가 굉장히 큰 가치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속이고 기만하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수준이 떨어지는, 질 낮은 인간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은, 속고 속이는 이 혼잡하고 번잡한 세상에 니체가 던지는 말이 뭘까. 어차피 너네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할 것이고 인간의 두뇌는 본디 속이고 기만하기 위함이므로 인간 혐오를 느끼며 살아가라. 같은 극단적인 이야기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니체야 말로 '진실'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파고들고자 하는 인간 중에 하나였겠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이 하찮은 '언어'라는 도구로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도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언어로써 우리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표현하지만 사람마다 진실의 정도는 차이가 있었고, 누군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꽤나 진실됐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다른 누구가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결국 언어로써는 그것들을 설명하는데 큰 한계를 가진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르다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몰두하기 보다 그냥 그런 삶의 모순을 인지하고 살아감 자체에 매 순간의 소중함과 기적을 느껴라는 것이 어쩌면은 니체가 건네는 얘기일 지도 모른다. 과연 이 엄청난 통달을, 뼛속깊은 NT인 나로써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도 절대 쉽지않은 부분이겠지만 그렇게 삶과 인간의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그게 매우 진실되지 못하고 부정한 것들이 섞여있다 할 지라도 그 모양 그대로를 두루 보며 살아가는 방법 자체를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어쨌거나 인간은 지능적인 동물이고,  특히 인성과 인격은 그 인간의 깊은 본연의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도 지능에 해당된다고 본다) 전혀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남을 이용하며 속이는 행위를 그야말로 남발하는 사람들은 그 천성 자체가 매우 미천한 부류라고 본다. 타고난 사기꾼은 잔머리 굴리는 능력과 낮은 도덕성, 그리고 상대를 혼란에 빠뜨릴 화려한 말발과 연기력, 최소 이 몇가지 조합이면 완벽하게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성숙한 인간이라면, 니체가 아무리 그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행동들이 인간의 생존본능에 의한, 원래 두뇌 발달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건강하고 성숙한 나 자신을 원한다면 '생존' 목적이랍시고 그런 부정적인 행위들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저급한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성숙한 고지능의 인간들이 해야될 것은, 도처에 널리고 널린 어리석은 사람들, 언제나 기회를 엿보고 상대를 공격하고 기만할 준비태세를 취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게 주의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뿐이다. 

 

 

 

 

 

요 근래 내가 한동안 심취되어 있었던 주제는 바로 나르시스트와 에코이스트의 관계이다. 사실 나르시스트는 한번쯤 누구나 흔하게 들어봤을법은 단어지만 에코이스트에 대해서는 매우 생소한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나르시스트에 대해 찾아보던 중 에코이스트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 두 성향은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르시스트는 통계적으로 20명중에 1명꼴로,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유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유형들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분류된다. 나는 한동안 이 나르시시스트에 대해서 유튜브며 네이버 포털 등등 여러가지 플랫폼에서 서칭을 해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정의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동안 어쩌면 꽤나 많은 나르시스트들을 만나오며 정신적 피로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 라고 단언할순 없지만 그들의 특징과 실체에 대해서 파악하고 이해할수록 꽤나 그럴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나르시시즘의 정의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Narcissos)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프로이트(Freud)가 이 말을 정신분석학에서 자아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에 대해 자기 자신을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인격적 장애의 일종으로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르시시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어린시절 그리스신화 책에서 '나르키소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벌을 받은 신화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유래로 자기 자신을 과장되게 사랑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나르시즘'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물론 그리스신화속에서는 나르키소스라는 인물이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나르시스트들은 실제로도 나르키소스 만큼이나 매력적이고 우월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이 그려놓는 이상적인 자아상, 자기 자신이 열심히 꾸미고 포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과도하게 심취한 사람들이라고 해석하는것이 더 옳지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 나르시스트들은 외현적 나르시스트와 내현적 나르시스트 두가지로 또 다시 분류되는데, 겉으로 잘 드러나는 외현적 나르시스트에 비해 내현적 나르시스트들은 그들의 실체와 정체가 매우 은밀하여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르시스트의 특징

 

여기저기 서칭을 통해 알아 본 것 중 나르시스트들의 많은 특징들을 읽을 수 있었는데 내가 경험해본것들 중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특징들을 골라보고 그 외 내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 보았다. 외현이든 내현이든 나르시스트들이 갖고있는 기본적인 특징들은 이러했다.

 

 

1.  자기 변명을 위해 타인을 가스라이팅 한다.

-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보니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고 정당화 시키기 위해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교란시켜 혼란스럽게 만든다. 굉장히 논리적인 척 언변을 늘어놓지만 완벽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2.  그렇기 때문에 고로, 거짓말 또한 잘 한다. (그런적 없는데? 내가언제? 상대를 교란시키기)

- 그런적 없는데? 또는 반대로 너한테 말해줬었는데? 너가 기억을 못하는건데? 라는 식으로 혼선을 준다. 그러면서 너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궁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상황의 팩트를 짚어보기 위해 노력하는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고 잘못을 전가하는 말들을 뱉는다. 주로 '정말 실망이야' 라는 말을 자주 쓴다. (나를 이해해주기 보다 의심부터 하는 너가 실망이야) 

 

3.  사소하고 아주 작은 불만제기나 지적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 정말로 사소한 작은 불만 표출,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은 표현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며 마치 상대방이 큰 잘못을 하였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 처럼 또 가스라이팅을 시전한다. 가스라이팅은 여러 상황에서 아주 빈번하게 자주 등장한다고 보면 된다.  

 

4. 그렇기 때문에 순간적인 분노 폭발로 폭언을 뱉을 확률이 높다.

- 자기 자신을 지적했다는 것에 과민반응하며 크게 분노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상대방에게 폭언을 내뱉는다. 그리고 분노가 사라지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애정표현을 하기도 한다. 

 

5. 그냥 형식적인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한다.

- 원래 나르시스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말로 사회 학습이 전혀 되지 않는 찐 나르시스트가 아닌 이상, 나르시스트들도 사회생활을 하고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도록 스스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났을 때 미안하다는 말로 일을 해결해야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진심이기 보다 마치 롤 플레이처럼 형식적인 '미안해' 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냥 미안하다고만 말할 뿐, 진심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왜 미안한지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는 할 줄 모른다. 

 

6. 동정심 유발을 통해 상대방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책임감을 떠넘긴다. (일종의 가스라이팅과 매우 비슷)

- 2번에 설명한것과 비슷하다. 상황을 회피하면서 너가 지금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그저 의심하면서 추궁하는 것이 나는 몹시 실망이야. 라는 식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면서 상대를 교묘히 나쁜 역할로 몰아가는 행동을 취한다. 

 

7. 관심받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자신의 사회적 가치에 매우 관심이 높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명성과 능력)

- sns를 굉장히 좋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퍼스널 브랜딩에 관심이 아주 높기 때문에 sns를 잘 활용하기도 하고 그렇다보니 실제 실물과 셀카 사진의 갭 차이가 많이 나는 현상이 빈번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보정된 자신의 모습이 실제 자신이라고 믿고 착각하는 현상이 짙음. 사회적 지위와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평판에 관심이 높기 때문에 굉장히 워커홀릭 처럼 일을 하고 바쁘게 늘 무언가를 한다. 그래서 진취적이고 목표지향적이기도 하고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건실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좋은 사람 처럼 보이는 그들과 매우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어보면 정말 딴판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7. 이성을 만날 때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기 보다 나를 돋보이게 해 줄 만한 그럴싸한 인물인가에 초점이 맞춰질 확률이 높다.

(연인을 트로피처럼 생각하는 것)

- 즉 러브바밍 이라고 하는데, 처음 누군가를 유혹할 때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플러팅을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급속도로 관심이 식으며, 그저 자기가 성공적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꼬셨다는 행위 자체에 쾌감을 느낄 뿐 관계 유지에 대한 흥미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그렇게 상대를 수단으로써 이용하고 가차없이 버리고 나면 또 다시 다른 희생양을 찾아서 러브 바밍을 하고 또 원하는 것을 얻으면 (누군가를 꼬시는 쾌감, 혹은 그 외의 것들 등등) 가차없이 상대를 평가절하하고 이별하고를 반복한다. 

 

8. 썸을 타는 단계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플러팅을 한다. 그러나 상대가 넘어오고 나면 놀라울 만큼 관심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성을 유혹하고 꼬시는데에 정복감이나 쾌감을 느낄 뿐 그것을 성공시키고 나면 관계 유지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다)

- 위에 설명한 것과 동일하다.

 

9. 외모가 우월하다?

- 글쎄 대체적으로 외모가 우월하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일단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높은 건 사실인 것 같다. 관심도가 높다보니 확률적으로 외모가 준수하고 우월한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과도하게 보정하고 포샵하는 모습들이 많다. 

 

 

 

결론적으로 자기 자신을 과장되게 사랑하는 나르시스트들은 겉으로 그 의미를 생각하면 매우 자존감이 높은 도도한 사람들인가? 라는 착각을 할 수 있는데  사실 그와 반대로 깊은 내면에는 '자기혐오'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애초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꾸준히 무언가를 실행하고 쟁취하려고 하며 그럴싸해 보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 하며 살아가므로 겉으로 봤을때는 매우 건실하고 성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모든것이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과도한 자기 자신의 대한 집착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나르시스트에 대해 알아보고 나면 왠지 조금은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절대로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을 느끼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결핍이 있다고 해서 타인을 가스라이팅하고 정신적으로 갉아먹는 행위를 일삼는다는 것은 절대 옳은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르시스트가 되는 원인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어린 시절 성장환경에 의한 영향이 매우 크다고 한다. 선천적 기질과 후천적 기질이 동시에 작용하긴 하지만 후천적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라고 결론을 지었는데, 나르시스트가 되는 원인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이유

핵심원인 : 주 양육자의 정서적인 방치과 공감 능력 부족

- 자녀에게 불안정한 자존감 형성

-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나르시시스틱 특성이 생김

 

부모측의 정서적 냉당함, 공감 능력 결여

- 자녀 측의 나르적인 성향

 

나르시시스트의 대표적인 특징 : 과대성이 형성되는 과정

정서적으로 냉담한 양육환경 지속

- 자아정체성의 결핍 지속

- 자신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공포감

- 스스로에 대한 과대한 판타지 형성

- 성인이 되어서도 과대사고, 우월감 지속

 

주 양육자에게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함

- 나는 사랑받지 못했으니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라는 무의식적인 믿음 형성

-불충분감, 무능감, 열등감, 공허감이 자리잡음 

(이러한 감정에 대한 반대 급부적인 행위로 신체적 아름다움, 재물, 권력 등의 외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과대평가하고 집착할 수 있다.)

- 내적인 결핍감을 보완/방어하기 위해 외적인 요소에 집착, 지나치게 가치를 둠.

- 내면의 정서적 빈곤을 회피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XiYXYpu1eRg 

 

 


 

 

 

 

그리고 사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 나르시스트라는 성격장애의 유형에 대한 설명에 국한되기 보다도 어떻게 에코이스트와 엮이는가에 대한 설명을 함께 덧붙이고 싶다.

 

에코이스트란?

(=Echoist심리학 용어나르시시즘으로  알려진 나르시스와 "에코(Echo)"에서 비롯된 용어이다나르시시스트와 가까운 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성향(be prone to being in relationship with)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자기애성 인격장애인 나르시시스트의 이기주의와 반대되는 성향으로 이타적이며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고문제가 생기면 스스로의 탓을 먼저 하며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특징이 있다.

 

 

쉽게 설명하면 나르시스트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감능력이 높고 굉장히 이타적이며 관심받기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에게 사랑과 애정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목받거나 부담스러운 관심을 불편해 한다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남에게 피해 끼치는것을 매우 꺼려하며 타인에게 관대하고 나에게 엄격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성향 또한 너무 지나치게 되면 자신을 과소평가 하는 면이 있으므로 자존감이 낮아질 확률이 있으므로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해야 될 필요가 있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한 공격성을 길러야 하는 것인 에코이스트들에게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과연 나는 에코이스트인가? 라는 자문을 해보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에코이스트적 성향을 내비치진 않지만 나의 바운더리에 있는 사람, 특히나 연인에게 있어서 만큼은 나도 모르게 한없이 상대를 먼저 배려해주는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연인관계에 있어서는 굉장히 에코이스트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코이스트 특징

 

1.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나르시스트의 반대이기 때문에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거나 남들 앞에서 잘난체 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자기 자랑으로 인해 자신이 혹시라도 오만해보이는 것을 꺼려하며 기본적으로 매우 겸손하다.

 

2.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인의 문제나 실수가 없었는지 먼저 살펴본다. 또는 자신을 먼저 탓한다.

-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탓한다기 보다는 혹시나 나의 실수로 인해 빚어진 사태는 없었는지, 나에게 부족한게 뭐였는지 스스로를 먼저 확인하고 검열해보는 성향이 매우 강한 것  같다. 

 

3.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 타인의 실수나 부족함은 너그러이 봐주는 반면에 자신의 실수나 잘못, 부족함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반성하거나 진지하고 신중하게 고쳐나가려는 노력을 취한다. 약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4.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 기본적으로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불편하거나 뭔가 피해 입는 상황을 싫어하며 내가 조금 양보하고 손해 보더라도 배려해주는것을 더 마음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5. 타인과의 갈등을 최대한 회피하고 싶어한다.

평화주의자적인 기질 때문에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아서 상대를 이해해주고 넘어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혹은 상대방의 잘못을 묵인해준다던지 내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는 편이다. 갈등으로 인해 모진말을 해야 하거나 남에게 어쩔 수 없이 나쁜말을 해야 하는 것을 굉장히 죄악시 여긴다. 

 

6. 생색낼 줄 모른다.

- 타인을 위하는 것이 그리 어렵거나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생색도 내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까~ 상대방도 나한테 이렇게 해줘야지? 고맙다고 생각하겠지? 등등 자기 과시적인 부분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만약 에코이스트가 생색을 냈다면 절대 진지한 것이 아니라 귀여운 애교나 장난에 불과한 것. 하지만 애초에 그런 장난 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7. 경쟁을 싫어한다.

- 평화주의적 기질이 다분해서 누군가와 싸워서 이기고 타인을 밟고 일어서서 내가 남보다 우위를 점하는 행위 자체에 관심이 없다. 만약 경쟁을 하더라도 자기자신의 개인의 목적과 목표를 위한 성취에 더 뿌듯함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남보다 우월해야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한다는 경쟁의식으로 자기 개발을 하지 않는다. 고로 남들과 비교선상에 두고 싸우는 전투적인 경쟁을 싫어한다. 

 

8. 눈치가 빠르다.

-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 생각들을 잘 경청해주고 잘 살피기 때문에 눈치가 빠르다. 

 

9. 확신이 없는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 그들이 자신감이 없고 줏대가 없어서 두루뭉술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 때문에 아무리 8~90프로 확신을 갖고 있더라도 나머지 10%의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즉 100% 확실한 것이 아니면 절대로 쉽게 확언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아주 작은 일말의 가능성도 매우 신중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인것 같아요, ~ 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의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10.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다. (감정수용성이 넓다)

- 위의 설명과 비슷한데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즉 감정의 수용성이 아주 넓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고 말 하는 것이 매우 쎄하고 이상하지만 그럴만한 아주 작은 이유나 원인 마저도 찾으려고 노력하고 한번 더 생각해보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적 호기심도 강해서 조금은 이상하거나 독특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 앞서서 저 사람은 왜 그럴까? 왜 저럴까? 라는 호기심으로 상대를 유심히 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의 폭이 넓은 것이다.

 

11. 남들의 질투를 받기 싫어서 일부러 못하는 척 행동하기도 한다.

혹시라도 뭔가 자만하고 오만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꺼려해서 잘 하는 것도 못하는 척, 혹은 매우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에코이스트들의 특성 때문에 나르시스트들이 매우 좋아할 조건들을 완벽히 갖춘 이들은 쉽게 그들의 재물이 될 확률이 높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해보려는 생각이 크기 때문에 나르시스트들이 본인의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나 가스라이팅도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에코이스트다. 그렇기 때문에 나르시스트들의 옆에서 정신적인 고통과 피해를 당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큰 것이다. 에코이스트의 특성에 대해 알아보니, 나는 절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코이스트는 아닌 것 같다. 부당함에 큰소리 치기도 하고 감정 표현이 즉각적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불편함을 바로 바로 드러내는 순간도 많은데 나의 경우는 아주 독특하게도 연인관계 즉 사랑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해서 굉장히 에코이스트적인 기질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부분이다. 아무튼 에코이스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공격성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있다. 순진하게도 에코이스트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같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 나르시스트들 처럼 타인의 감정을 착취 하고 그것으로 쾌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지적으로도 똑똑하며 매우 양심적인 성향을 지닌 착한 심성을 가진 에코이스트들이 부디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본인이 갖고 있는 아름답고 예쁜 인성을 나르시스트 같은 사람들에게 절대 착취당하고 공격받지 않길 바란다.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두번 읽게 되었다. 실제로 작가가 자신에게 상담받았던 내담자들의 사연을 예로 들어 심리학적 분석을 설명하고 이야기하는데, 타 심리학 도서들처럼 어려운 전문용어가 자주 등장한다던지 그래서 내용을 이해하기에 시간이 다소 걸리거나 그런 불편함은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편하고 읽기 쉽게 쓰여있다.

책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주제는 '의존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에서는 '성에사는주민'과 '마을에사는주민'으로 빗대어 이를 표현했는데 독립적이긴하나 지나치게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절대 함부로 자신의 맘을 내비치지 않는 큰 성벽을 쌓고 사는 주민, 반대로 남들과 사교적으로 잘 지내는것 같지만 지나치게 타인 의존적이며 남들의 평판에 예민하여 수시로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마을에 사는 주민. 이렇게 두가지로 분류하여 표현하였다.

결국은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어느 한쪽도 심각하게 치우치지않은 적당한 밸런스 유지가 최선임을 얘기하고있고, 문득 저 얘기를 들으니 유명한 작가 겸 방송인 '허지웅'님이 생각났다. 그가 종종 티비에 나와서 어린시절의 힘들었던 경험들을 펼쳐내며 자기 자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하지 않은게 없었고, 혼자서 모든걸 처리하고 해결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혼자서' 모든걸 해왔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오기도 했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누구에게도 도움 요청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할 수 없었을수도있고 하지 않은걸수도 있지만) 타인에게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걸 해결하며 살아온 삶이 그렇게 대단하고 멋있는것만은 아니었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게 생각났다. 토씨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대충 떠올려 보자면 그런 의미였다.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나는 극단적으로 혼자서 벽을 쌓는 사람도 아니며, 또 너무 타인에 의존적이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인간으로써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 역시도 극단적으로 성벽을 쌓고 살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꽤나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을 했었고 뭐가됐든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지는 패턴은 정서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혼자서 완벽하게 모든걸 처리하려는 행동이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하고 멋있는 일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타인에게 절대 기대지않아' 라는 고집 때문에 누군가 내게 도움을 청할 때 그 도움의 자세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민폐라고 여기거나 매우 냉소적이게 될 수 있다.



'홀로서기란 의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시작되며,
독립과 의존 욕구 사이에서 서핑하듯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건강한 의존이란 부족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부분에 관해 힘 있는 사람에게 정확히 도움을 요청 하는 것'

'객관적인 의존은 나와 타인 모두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두번째 화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류시화님이 쓴 책 '날아가는 새는 뒤돌아 보지 않는다' 에서도 언급됐던 내용이라 괜히 반가운 맘이 들었다. 즉 책에서 말하는 것은 '감정은 죄가 없다. 감정에 대한 나의 감정이 문제일 뿐' 이라는 말로 짧고 굵게 핵심을 전달했다. 슬픈마음, 화나는 마음, 억울한 마음 모든 감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의도치 않은, 예기치 못한 말이나 상처를 외부로 부터 받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첫번째 화살이지만 그 첫번째 화살을 느끼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두번째 화살을 쏘는 것이 실질적으로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 감정에 오래도록 파뭍혀 있거나 계속해서 그 감정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 하고 죄책감 느끼도록 하는 행위는 스스로에게 쏘아대는 잔인한 두번째 화살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번째 화살때문에 스스로를 괴롭고 힘들게 한다.


'나를 심판하는 판사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첫번째 화살도 아픕니다. 그런데 정말 아픈것은 두번째 화살입니다.
'두번째 화살은 첫번째 화살에 대한 대응으로 내가 나에게 쏘아대는 화살입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문제를 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이러이러한 환경에서 이러이러한 경험들을 겪었고 그로인해 너무 아픈 트라우마가 생겨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내 오랜 상처이므로 앞으로도 고쳐내기가 힘들거야. 라는 식으로 절망적인 생각들을 많이 생각하는데, 물론 트라우마의 종류가 뭐가 됐던지간에 그걸 이겨낸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않은게 팩트이고 어쩌면은 끝없는 숙제가 될 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좀 더 내가 '능동적'으로 고쳐 나갈 수 있는 한 부분이라는 인식을 하게끔 해주는 문장이 있어서 되게 좋았다. 그것은 바로 트라우마로 인한 방어기재나 반복되는 행동양식들을 그저 '습관'으로 달리 생각해보자는 부분이었는데, 트라우마 라는것은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기 때문에 정신적 질환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그저 '습관'으로 바라보게 되면 '트라우마'라는 거창한 단어에서 느껴지는 부담감이 덜고 내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가벼운 문제 정도로 여길 수 있다는 부분이 나름대로 신선한 관점의 전환이라고 느껴졌다. 우리에게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는 '습관을 바꾸기'라는 쉬운 관점으로 이를 다룬다면 훨씬 부담도 덜고 효과적일 수 있지않을까.


'심리의 문제를 습관의 문제로 바라 볼 때 얻게되는 가장 큰 수확은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 입니다.
습관은 내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프레임
국내도서
저자 : 최인철(Incheol Choi)
출판 : 21세기북스(북이십일) 200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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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을 의미한다. 책에는 많은 다양한 예시들을 통해 '프레임'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프레임'을 달리함에 따라 심리적으로 모순된 어떤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여러가지 흥미로운 실험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모든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혹은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라는 말들을 자주 접해온지라, 내 마음가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이론은 그렇게 대단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익히 알고있는 사실들도 종종 간과하기 마련이다. 어릴때는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의미로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이 교훈을 거의 주입식으로 듣다시피 하기도 했는데, 물론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긍정의 효과를 위해 부정적 프레임을 다시 리프레임 하라는 말을 전달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바로 그 긍정의 프레임이 주는 심리적 모순까지 함께 얘기하고 있다. 주로 광고 회사나 여러 매체에서 이 '아' 다르고 ' 어' 다른 수준의 단순한 차이를 통해 소비자들의 생각의 틀을 바꿔버리기도 하는데 어쩌면 이런 모순된 효과로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하여 그들의 소비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나온 예를 하나 들자면, 세일상품을 충동구매 하는 경우가 바로 이 모순에 해당한다. 만약 원래 정가가 50만원인 상품이 있다고 했을때 어느날 그 상품이 할인가로 2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물건을 구매하면 마치 30만원을 절약한것 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우리는 20만원이라는 지출을 했을뿐 이란거다. 물론 오래전부터 그 제품을 사려고 계획 했으나 비싸서 계속 미루어두다가 할인기간에 저렴하게 산거라면 나름대로 절약의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구매 목록에 없던 상품인데 '세일'이라는 유혹에 이끌려 충동구매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건 사실 그냥 '지출'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프레임은 아주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프레임은 때때로 고정관념이 되기도 하고 부정적인 틀이 되기도 하며 오해와 편견을 만들고 또 위의 예시처럼 객관적 사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레임이라는 것이 꼭 나쁜 부작용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사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프레임이 낳는 이 많은 오해와 편견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현명하게 판단하고 벗어날것인지, 모순되고 왜곡된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옳은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 프레임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단순히 '긍정적이도록 하라'는 메시지 보다도 어떤 프레임을 가져오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 왜곡 현상을 인지하고 깨닫자는데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사실 생활속에서 이 '프레임'이라는 개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이 개념을 쉽게 대입해볼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말하는 '색안경' 이란것도 결국 프레임이라 할 수 있고 무언가를 보고 판단할 때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내가 경험한 데이터베이스를 기준 바탕으로 그것을 파악하고 꿰뚫어보려는 경향이 있는것도, 개인의 경험이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개인의 생각이나 모든 개념 따위를 전부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됐든 삶을 살아가는 데 저마다의 기준이 있기때문에 '프레임'이란걸 완전히 벗어버리고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어느새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진채로 나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 프레임을 다시 '리프레임' 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을 인식하고 점검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된다.


부정적 프레임을 갖고있는 사람은 희망속에서도 불행을 찾마내고 긍정 프레임을 갖고있는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본다고 했다. 부디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개인의 프레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결코 방해물이 되선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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