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인간관계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없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여러 이유에 의해서 사람을 정리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중요한것은 어떻게 정리하는것이 올바르고 건강한 방법일 것일까? 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꽤나 심오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 내 인생에 다양한 변화와 발전이 생기는 만큼 인간관계에도 동시에 변화가 있었다. 즉 나를 위해서 불필요한, 불건전한 혹은 유해했던 인간관계들을 정리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단순 몇번의 사소한 다툼이나 오해로 섣불리 관계를 끊어버려야 겠다 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관계에 대해 심오하게 다시 고민하고 손절을 고려해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그 관계는 훨씬 그 이전부터 뭔가 불편함이 있었을 확률이 크다. 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일까?를 고민해보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1.손절을 하는 다양한 이유들

 

일단 왜? 그 관계를 정리하고싶은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발적으로 관계를 손절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무언가 쌓이고 쌓인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조금씩 쌓아오다가 어느순간 어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손절을 하게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만약 단순 의견 충돌이나 갈등 때문이라면 그 갈등이 원만히 해소 될 가능성이 있는가를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대부분 그런 경우들은 대게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편이지만 손절을 해야만 하는, 필히 손절이 필요하다 여겨지는, 또는 최소 손절을 고민해봐야 되는 상황이란 어떤걸까.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을 기준으로 나름대로 나열을 해보았다. (여기서는 어떤 집적적인 싸움이나 사건이 계기가 되는 '확실한' 경우는 제외한다.)

 


 

(1) 내가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때.

(무시받는다는 기분/상대방의 무례함/선넘는 발언/불쾌함/불편함/나에대한 부정적인 평가만 함/칭찬을 전혀 하지 않는사람 등등)

 

(2) 결이 너무 다르거나 혹은 무슨 이유가 됐든 만났을 때 어떠한 즐거움이나 흥미를 찾을 수 없는 경우.

(특별히 기분이 상하는것도 아니지만 만났을 때 기쁨이나 반가움이 없다. 즉 그냥 명목상 친구관계 유지 느낌.)

 

(3) 서로 꼽씹는 추억의 해석이 너무 다를때.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내 모습으로써만 나를 취급하며 현재의 변화된 내 모습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 등등)

 


 

 

(1) 내가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때.

 

정말 다양하고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상대방의 무례함, 선넘는 발언, 가스라이팅 등등 이 모든 불쾌한 감정들을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라는 말로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 부분은 너무도 당연한 부분이라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겠다. 

 

 

 

(2) 결이 너무 다르거나 혹은 무슨 이유가 됐든 만났을 때 어떠한 즐거움이나 흥미를 찾을 수 없는 경우.

 

그리고 딱히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한번쯤은 고민해봐야 되는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무엇을해도 그닥 즐겁지 않은 관계"를 뜻한다. 사실 이 경우는 뭐 그렇다고 손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친구사이라는 것은 사실 함께하면 즐거운가? 기쁜가? 편안한가? 이런 작지만 사소한 감정들의 공유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특별한것을 하지 않아도 만나면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기 위해서는 꽤나 결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취미라던지 취향, 가치관, 생각 등등이 말이다. 어느정도 교류 가능한 관심분야나 교집합이란게 최소 있어야 하는데 정말로 아무런 교집합이 없는 친구사이라면 혹시나 그냥 명목적으로 이어가는 친구사이는 아닌가?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는 꼭 기쁜 즐거움이 아니더라도 서로 고민하는 부분이 비슷하거나 혹은 다소 어둡고 우울한 주제라 해도 공감대 형성이 잘 되서 대화가 잘 통한다거나 깊은 대화가 잘 이뤄지는 친구도 나쁘지않다. 즉 서로 슬픔이나 우울을 느끼는 결이 비슷한 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물론 이 경우에는 조금 조심해야 될 부분이 있다. 너무 우울하고 딥한 부분들만 공유하다보면 결국 힘들때만 서로를 찾는다거나 또는 의도치않게 서로를 너무 '대나무숲'처럼만 이용해버리면 기쁘고 즐거운 소식에는 서로 공감해주지 못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무튼 이런 부작용만 아니라면 깊은 대화가 잘 나눠지는 친구 역시 소중하다. 남들과는 쉽게 공유하지 못하는 감정과 생각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것도 아주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는 또 늘 주의해야될 것이, 그만큼 많은 깊은 부분을 공유한 사이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 관계의 틀어짐이 발생했을 때 누구보다 나의 어두운 부분을 잘 아는 상대방이 그것을 약점 잡아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아 지금이라도 이사람의 실체를 알았구나. 라고 깨닫고 깔끔하게 손절하면 된다. 물론 상처받은 마음은 당분간 좀 아프겠지만, 정상적인 친구사이라면 둘 사이에 아무리 사소한 다툼과 서운함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 동안 공유했던 감정들과 비밀들을 약점 잡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고 그것을 어떤 계기로 늦게 깨달은 것 뿐이다.

 

 

 

(3) 서로 꼽씹는 추억의 해석이 너무 다를때. (변화한 현재 내 모습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

 

쉽게 말해서 나에게는 그 당시가 내 인생의 암흑기였으나 친구의 입장에서는 자기 인생의 황금기였을 때 라고 예를 들어 보겠다. 사실 이거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순간을 살아가며 시간을 보내지만 각자의 사정이나 환경, 생각들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 시절 친구들을 다시 재회하고 만났을 때 발생한다. 많은 시간이 흐른만큼 몸도 마음도 변했을 것이고 각자 나름대로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 왔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어리숙했던 내 모습, 또는 암흑기였던 내 모습만을 회자하며 나를 웃음거리 만들거나 또는 끊임없이 '흑역사'라고 불리울 만한 것들을 건드리면서 깎아내릴 때 비로소 문제가 발생한다. 보통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만 자신의 영광이 머물러 있을 확률이 거의 백발백중이다. 그 시절이 본인의 가장 황금기, 리즈시절이었고 현재는 그에 비해 너무 초라하거나 보잘 것 없어서 죽을 때 까지 그때 그 과거의 영광만 안주거리 삼으며 얘기하는 것이다. 사실 자기 자신의 황금기를 추억하는 것 자체가 나쁜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서 비약적인 변화나 발전, 성공을 일궈낸 친구를 만났을 때 공격태세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일삼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이 부분은 (1)번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때에도 해당하는 디테일한 예제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사실 누구나 하나씩 부끄러운 기억이 있고 흑역사란것이 존재하며 우스갯거리로 농담삼아 그런 우스운 과거를 언급하면서 지금의 '용'(?)된 친구를 놀려먹을 수도 있지만 "무튼 너 정말 그때에 비하면 지금 정말 멋져." 라는 의미로 그런 과거를 운운하는 것과 그저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계속 들추며 내게 수치심을  주려고 하거나 현재의 모습을 질투하고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꾸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 이 두가지를 단호하게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로 나의 변화를 칭찬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괜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나를 깎아 내리기 위함 혹은 남의 흑역사로 히히덕덕 거리며 안주거리 수준 삼기 위해 끊임없이 운운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당신의 기분이 묘하게 불쾌하고 언짢다면 분명 후자에 해당되는 경우일 것이다. 

 

 

 

 

2. 그래서 어떻게 손절을 해야돼?

 

결론은, 그래서 어떻게 손절하는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괜찮은 방법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런 관계들의 문제를 알면서도 손절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래도 다시 만들지 못하는 학창시절 친구라는 이유, 어떤 한 집단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꽤나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친구 한명과의 손절이 아니라 나아가서 혹여나 내가 그 집단을 탈퇴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나만 혼자 열외되는것에 대한 두려움 역시 있는 것 같다.

 

사실 나같은 경우는 위의 손절 조건에 다 해당이 되지만 바로 관계를 손절하지 못하고 꽤나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했던 그룹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생각보다 자주 보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도 한 몫 했다. 그러나 1년에 한번 주기로 만나는 모임이나 관계라고 할지라도 만날 때 마다 항상 빠짐없이 내게 불쾌감을 주는 인물이 있다면 손절이 마땅하다. 사실 인맥유지, 인맥관리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이러한 병든 관계들을 많은 사람들이 방치하곤 한다. "1년에 한번 보는 사인데 뭐, 그냥 넘어가자"라고 했던 것이 몇년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도 어쩜 만날 때 마다 내게 늘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우리 기억은 그 불쾌한 기억의 데이터를 고스란히 분명 기억하고 있고 그것들이 조금씩 쌓여간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런 불만들을 토로하고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사실 이것은 손절 방법이 아니라, 관계유지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상대방이 정말로 내게 '악의없이' 저지른 실수라는 게 입증되었을 때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방법이지, 의도적으로 나를 불쾌하게 한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시도 자체를 해야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미 성인이 된 인간이라면, 이미 그렇게 뒤틀려져버린 인성은 내가 말 몇마디 한다고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이런 진심어린 토로를 했을 때 더욱 나를 소심한 사람 취급하거나, 더 우습게 여기게 될 수 있으므로 정확한 판단에 의해서 시도해보아야할 방법인 것이다. 아주 이상적이고 평화로운 해결법 같지만 그만큼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보통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으며 멀리 하는 방법이다. 가장 부담이 덜하고 쉬운 방법이다. 사실 어차피 1년에 한번 정도 보는 사이라면은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은건지 조차도 모르게 더욱 더 조용히 손절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로 일거수일투족 자주 연락을 하는 친구사이 였다면 이 방법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방법을 택하더라도 티가 날 수 밖에 없고 결국 나의 불쾌감을 토로하고 손절하느냐, 그냥 알리지 않고 무대뽀로 손절을 취하느냐. 이 차이 정도인 것 같다. 대충 나열해보자면,

 


 

간접적인 방법 : 그냥 혼자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연락을 끊으며 쥐도새도 모르게 손절한다.

(단톡, 소셜미디어 다 연결되어 있지만 어떠한 소통도 하지 않고 심지어 먼저 연락이 와도 안읽씹 상태로 평생두기.

가장 간접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이면서 매우 회피식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간접&직접적인 방법 : 소셜 미디어 외 모든 연락망들을 언팔, 차단하거나 대놓고 읽씹 또는 단톡방을 조용히 나오는 방법

 

직접적인 방법 : 그동안의 불만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약간의 언쟁을 주고받은 후 깔끔히 손절.

 


 

손절이란게 사실 뭐 별거 없다. 결국은 위 방법들 중 하나로 대게 손절하게 된다. 나는 저 세가지 모두 다 시도해본 바 있고, 오히려 나의 경우는 극강의 간접적인 방법을 가장 적게 시도해본 것 같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겠으나, 사실 대부분 저 단계를 그라데이션으로 거치게 되지않나 싶다. 아무튼 내가 결국  추천하고싶은 것은 결국 각자 성격대로 하겠지만 "지금 당장 내게 가장 데미지가 덜 오는 방법"을 선택하시오. 라고 말하고 싶다. 간접적인 방법은 손절이 가장 쉽고 편리할 순 있지만 끝낼 때 끝내더라도 하고싶었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한거에 대해서 나중에 약간의 찜찜함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반대로 직접적인 방법은 정신적 타격과 데미지가 크다. 솔직하게 말 하는 만큼 크고 작은 언쟁이 분명 오고갈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후려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과한 에너지 소모로 여기질 수 있기 때문

 

결국 마지막 남은 간접&직접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것을 선택했을 경우에 상대방의 반응은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왜 손절하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상대방이 다시 연락오는 경우 (대화시도)와 다른 하나는 상대방도 군말없이 손절을 받아들이고 자연스레 끝나게 되는 경우다. 대게 전자의 경우가 많지만 후자의 경우도 참으로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그 의미는 상대방도 그다지 그동안 내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별 미련이 없다. 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혹은 본인들의 자존심 때문에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어차피 손절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자. 만약 상대방이 먼저 연락이 오는 형태의 전자의 경우라면, 간단&명료하게 의사를 밝히고 끊어내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한다. 만약 상대방이 혹시라도 사과나 화해의 의사  표시를 한다면 또 다시 고려해 볼 여지가 발생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깔끔하게 전달 할 말만 남기고 끝내는 것이 가장 깔끔하다. 물론 여기서 상대방이 내게 사과하기 위해 다가온다면 또 그것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파악해야되겠지만, 사실 손절을 고려할 만큼 고민했다는 것은 이미 상대방의 무례함, 나와 맞지 않음 등등을 꽤 오랜시간 겪어온 것이기 때문에 잘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나는 우습게도 몇년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연락이 오는 경우들을 경험했는데, 여기서도 사실 내 기준은 확고하다. 화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서로 흥분한 상태로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끝나버린 거였다면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풀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단호하게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라고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은 바로 그 당시 싸움에서 인신공격성 발언이 얼마나 있었느냐 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명확한 기준으로 다시 연락이 왔을 때 대화를 나눌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구분한다. 사실 예외적으로 인신공격성 발언이 있었음에도 정말로 진심으로 뉘우치고 미안하다고 바짝 엎드려 사과하는 흔치 않은 케이스가 있는데,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다지 속아넘어가지 않는 것을 추천하다. 정말로 어쩌다 개과천선하는 대단한 인물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인간의 인성그릇이라는 것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마무리

아무튼 인간관계에서 어떤 불쾌한 경험을 했을 때, 그 이후로 손절을 진지하게 고민 한다면 잠깐 물러서서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먼저 가져봄도 괜찮다. 조금 흥분이 가라 앉았을 때 오히려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가라 앉고 나서도 여전히 손절에 대한 마음의 변화가 달라지는게 없다면 그 관계는 이미 가치를 잃었음이 분명하다. 나이를 먹어 갈 수록 오래오래 연락하고 평생 가겠지 생각했던 관계들도 하나 둘 변하거나 달라지고, 끊임없이 상대방으로 부터 상처를 받거나 실망하는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럴 때 현명하고 우아하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스스로 깨닫고 숙지한다면 좀 더 현명하게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국내도서
저자 : 류시화
출판 : 도서출판더숲 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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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 '한줄도 너무 길다.' 이후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류시화님의 책이다. 어린시절에 류시화님의 인도 여행기를 읽고 한때 나도 인도에 대해 환상을 가득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이 책에서도 류시화님은 인도 사상과 철학, 그리고 오랜 인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많은 얘깃거리들을 흥미롭게 소개해주고 있는데, 나는 인도의 잔인한 현실을 알게된 후 부터 인도에 대한 환상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고유 문화와 명상, 철학, 깨달음 등등 많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엿볼수 있었다. 류시화님의 오랜 여행 경험과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엮은 그의 에세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쩌다보니 내가 이 책을 두번, 세번에 걸쳐 나눠읽게 되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는 속도감 있게 책 전체를 빠르게 훑어 읽었고 두번째 , 세번째 읽을때는 한 챕터 한 챕터 짧은 이야기들을  곱씹으면서 아주 천천히 읽게 되었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전에 또 한번 책을 음미하며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신념과 정의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딪힐 때 그럴 때도 이 책에서 류시화님이 전하는 주옥같은 얘기들을 다시금 꺼내어 회상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들게끔 하는 그런 책. 그 만큼 이 책에서 류시화님이 전하는 얘기들은 삶 전체를 아우르는 깊은 통찰력을 제시하면서 우리 삶의 지침서가 되어줄만한 '삶의 철학'들에 대한 많은 얘기들을 전달 해준다. 그런 점에서 언제고 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마다 다시금 펼쳐 읽으면서 맘속에 되새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숫자에 포함시킬수 없는 사람 _ 나와 너>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라고 썼다.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이다."

 

 

인간이 맺는 관계의 두 종류 나-너, 나-그것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고 싶은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나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맘속에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고 그것에 대해 정의 내리고 어디까지가 얼마나 진심의 관계인지를 마치 늘 점검하는 것 같다. 특히나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오히려 고독함, 외로움 따위의 감정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중요한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소통하느냐 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고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을 그릇 하나가 없다면 결국 군중속에서도 나홀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거다.

 

나-너, 나-그것.

 

'나-너'가 순수한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진짜 관계라면 '나-그것'은 존재의 가치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기능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것이라고 했다. 즉 얼마든지 내가 아니어도 비슷한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그런 흔한 자리. 그게 '나-그것'의 관계다. 공적인 상황에서 맺어지는 나-그것의 관계는 어쩔수 없이 당연한 것이지만 내게 소중한 사람, 내 연인, 가족, 친구들까지 나-그것의 관점으로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 얼마나 외롭고 공허한 일일까. 그럼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수시로 '나-그것'의 잣대로 평가하고 매기는데에 익숙해져 간다. 스스로 고독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너무 외롭다고들 호소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쌍방으로 이루어지는 '나-그것'의 관계는 상상만해도 공기가 얼음장 같이 차갑다. 아니, 그저 공허하기만 하다. 마치 서로 완벽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다른 예로, 내가 상대방을 '나-너'의 존재로 대했으나 상대방은 나를 '나-그것'으로써 대해왔다는것을 알았을 때 그 때 느끼는 상처와 상실감도 우리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남겨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또 상대방에게 주기도 한다. 관계는 상황에 따라 '나-너'로 정의 할 때가 있고 '나-그것'이어야할 때를 구분지어야 하지만 내가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건 '나-너'로 유지되어야 하는 깊숙하고도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 역시도 '나-너' , '나-그것' 이 두가지 사이에서 미친듯이 혼란을 겪으며 왔다갔다 하는 사람, 아예 둘 중 하나에만 꽂혀 거기에 모든 의미를 다 쏟아붓는 사람 등등 여러가지들을 보았고 경험했다. '나-너'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주 이상적이면서 따뜻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그것'의 관계에 모든걸 쏟아붓는 사람을 상상하면 마치 허울 좋은 껍데기들을 열심히 쓸어모아 담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외로움을 끊지 못한다. 당연히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그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만큼이나 안타까운 건, '나-너'와 '나-그것'의 관계 사이에서 줏대없이 왔다갔다 자기 자신을 계속 시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있노라면 나 마저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횡설수설하며 하는 말마다 일관되지 못하고 관계에 대한 평가도 언제나 늘 극단적이고 심지어 수시로 바뀌기까지 한다. 어떤날은 나를 최고로 칭찬해주지만 어떤날은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평가매기는 것 처럼. 그것은 나를 보는 평가 기준을 '나-너'로 보았다가 다시 어느날은 '나-그것'으로 보았다가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수시로 관점을 달리하여 계속 평가 매긴다면 그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일까. 그렇게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는 종잇장 같은 관계를 가면을 쓰고 유지해 나간다는게 얼마나 큰 에너지 소모이며 낭비인지. 결국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되어 스스로에게 비수 꽂는 일이 될거라는 걸,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내가 자초한 일이란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나-너, 나-그것의 관계에 대해 읽으면서 너무 많은 슬픈 인연과 이별과 관계들이 떠올랐다. 내가 진심이더라도 상대방은 내게 그렇지 않은 관계들은 살아가면서 언제가 또 다시 겪을 수 있도 있다. 아마 내 마음대로 그것들을 미리 알아차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느날 그 실체를 깨달았을 때 혹시라도 그동안 내가 쌓아온 '나-너'라는 순수한 마음이 너무 아깝고 가슴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 관계를 끊어내지 못해선 안될 것이다. 냉정하게 그들을 끊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살면서 계속 수많은 관계를 맺고 이별을 겪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를 '나-그것'의 관계로써 대하며 상처를 준 사람들을 끊어내는 일에 계속 맘 아파 해선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런 이별에 담담해지고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참다운 관계를 만들고 유지해나가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닭이 몇 마리인가_생명들에 값하는 삶>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닭과 소와 돼지를 먹는가? 매일 얼마나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그 목숨에 값하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 들여다 보는 것만큼 중요한 명상은 없다."

 

 

마치 이 글을 쓰면 내가 당장이라도 채식주의를 선언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나로써는 종종 육식을 하는 것,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고찰에 불현듯 빠지곤 하는데 그럴때 마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가치관에 따른 자유 선택이라는 결론을 늘 내린다. 그치만 또 다시 '정말 채식이라도 해야되는걸까'라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는데 바로 유튜브로 야생동물 구조 관련 컨텐츠를 보거나 아니면 반려동물로써 강아지, 고양이가 아닌 오리, 돼지와 같은 동물을 키우는 유튜버 영상을 볼 때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뿐,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언제나 '고기는 사랑입니다.'와 같은 얘길 하게 된다는게 꽤나 나 자신이 이중적이게 느껴지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야생동물 영상같은걸 보면서 공감이나 하지나 말던가)

 

 

그런 와중에 닭이 몇 마리인가. 라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읽게 되었는데 통합의학 선구자라는 의사 레이첼 나오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든여덟살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겪은 이야기다.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아침마다 15분씩 함께 명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레이첼도 옆에 앉아 명상을 함께 했다. 그러고 한참 후 눈을 뜬 어머니가 레이첼을 바라보자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닭을 세고 있었지." 라고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명상을 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실망하고 당황한 레이첼에게 어머니가 이렇게 다시 말한다. 저녁 식사 때 닭고기를 먹고나서, 불현듯 평생 동안 매주 한번이나 두번은 닭고기를 먹었다는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머리로 계산하기 시작했고 두마리의 닭을 52주에 84년을 곱하니 8천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그 많은 동물들의 희생의 가치가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때때로 남에게 아픔을 준 적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적은 없으며, 누군가에게 거짓말이나 비난을 한 적도 없음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생은 그 닭들의 희생 만큼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어머니는 대답했다고 한다.

 

 

"매일 얼마나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우리와 똑같이 살아 있기를 원하고 행복을 갈망하는 생명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삶을 잘 사는 것 만이 그 생명들에게 값하는 길이다."

"그들이 어느날 꿈속에서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자신들의 수많은 희생에 값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채식과 육식에 대한 생각과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해 조금 도움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채식을 선택하든 육식을 선택하든 가치관에 따라 판단 할 일이며 뭘 선택해도 틀린건 없지만, 채식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순수한 생명들의 희생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인간으로써 그 희생에 헛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채식주의를 한다는게 그냥 풀만 뜯어먹는 간단한 일인것 같지만 영양소 불균형을 맞춰줘야 되기 때문에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 매우 힘들고 까다롭다. 그리고 알다시피 인스턴트나 가공식품에 육류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거의 없고 라면스프만 해도 이미 육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가난한 사람이 채식주의를 하겠다는 것은 굶어 죽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경우엔 오히려 채식을 하거나  healthy food를 지향하는 경우 대부분 상류층인 경우가 많고 그 외 서민들은 맥도날드에서 저렴한 값의 햄버거를 사먹거나 하는것이 일상인 것이다. 우리도 편의점에서 간단한 컵라면 한끼 떼우는게 가장 저렴한 한끼 식사이듯이 말이다.

 

 

어쨌든 채식을 한다는것은 정말 만만치 않는 부분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더욱 '회식'문화를 생각해보면 나 홀로 '채식주의'를 선언하면서 매번 고깃집 회식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 지인, 친구들과 만날때도 식당을 찾을 때 마다 채식 레스토랑 찾아야 하거나 혹은 일반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주문하면서도 '육류'를 빼줄것을 당부하는 것 등등. 채식주의가 한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이렇듯 막대한 수준인데 희생되는 동물들이 그저 '불쌍해서, 가엾어서.' 라는 공감대 만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더욱이 채식주의 생활은 불가능 하다고 본다. (산속에서 자급자족을 하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순간의 감정으로 책임지지도 못 할 '우발적인' 채식주의 선언을 한다거나 채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과한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동물을 사랑하지만 육식주의자 라는게 외람되고 이상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의 희생의 값어치 만큼 나는 가치 있는 삶을 나는 살고있는가"를 질문 한다는것이, 채식과 육식을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많은 생명체들의 희생을 존중함에 있어서 충분한 명상의 가치가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다면, 건강을 해칠 수준으로 과도하게 육식을 섭취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도 커진다. 채식주의자가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 건강을 해칠 수준의 불필요한 육류 섭취는 피할 수 있는 것. 바로 '채식지향'이 어느정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외에도, 책의 제목처럼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 '두번째 화살' 등등 마음속에 깊이 와닿는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배울 수 있는 책이었고 내 삶에서 명상의 시간이 필요할 때, 고독의 시간이 필요 할 때, 또 다시 내가 방향성을 잃었다고 생각 될 때마다 이 책을 집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임
국내도서
저자 : 최인철(Incheol Choi)
출판 : 21세기북스(북이십일) 200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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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을 의미한다. 책에는 많은 다양한 예시들을 통해 '프레임'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프레임'을 달리함에 따라 심리적으로 모순된 어떤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여러가지 흥미로운 실험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모든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혹은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라는 말들을 자주 접해온지라, 내 마음가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이론은 그렇게 대단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익히 알고있는 사실들도 종종 간과하기 마련이다. 어릴때는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의미로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이 교훈을 거의 주입식으로 듣다시피 하기도 했는데, 물론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긍정의 효과를 위해 부정적 프레임을 다시 리프레임 하라는 말을 전달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바로 그 긍정의 프레임이 주는 심리적 모순까지 함께 얘기하고 있다. 주로 광고 회사나 여러 매체에서 이 '아' 다르고 ' 어' 다른 수준의 단순한 차이를 통해 소비자들의 생각의 틀을 바꿔버리기도 하는데 어쩌면 이런 모순된 효과로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하여 그들의 소비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나온 예를 하나 들자면, 세일상품을 충동구매 하는 경우가 바로 이 모순에 해당한다. 만약 원래 정가가 50만원인 상품이 있다고 했을때 어느날 그 상품이 할인가로 2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물건을 구매하면 마치 30만원을 절약한것 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우리는 20만원이라는 지출을 했을뿐 이란거다. 물론 오래전부터 그 제품을 사려고 계획 했으나 비싸서 계속 미루어두다가 할인기간에 저렴하게 산거라면 나름대로 절약의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구매 목록에 없던 상품인데 '세일'이라는 유혹에 이끌려 충동구매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건 사실 그냥 '지출'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프레임은 아주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프레임은 때때로 고정관념이 되기도 하고 부정적인 틀이 되기도 하며 오해와 편견을 만들고 또 위의 예시처럼 객관적 사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레임이라는 것이 꼭 나쁜 부작용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사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프레임이 낳는 이 많은 오해와 편견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현명하게 판단하고 벗어날것인지, 모순되고 왜곡된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옳은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 프레임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단순히 '긍정적이도록 하라'는 메시지 보다도 어떤 프레임을 가져오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 왜곡 현상을 인지하고 깨닫자는데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사실 생활속에서 이 '프레임'이라는 개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이 개념을 쉽게 대입해볼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말하는 '색안경' 이란것도 결국 프레임이라 할 수 있고 무언가를 보고 판단할 때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내가 경험한 데이터베이스를 기준 바탕으로 그것을 파악하고 꿰뚫어보려는 경향이 있는것도, 개인의 경험이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개인의 생각이나 모든 개념 따위를 전부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됐든 삶을 살아가는 데 저마다의 기준이 있기때문에 '프레임'이란걸 완전히 벗어버리고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어느새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진채로 나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 프레임을 다시 '리프레임' 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을 인식하고 점검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된다.


부정적 프레임을 갖고있는 사람은 희망속에서도 불행을 찾마내고 긍정 프레임을 갖고있는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본다고 했다. 부디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개인의 프레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결코 방해물이 되선 안될것이다.




 

 

 


여느때와 다르게 출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증가한 코로나 확진자 수 때문에 왠지 맘 한켠이 무겁고 걱정됐다. 괜히 내가 타고 있는 이 버스안이 불결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안전하게 출근할 수 있는 자차가 내겐 없다는 사실도,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운전면허 하나 없다는 사실까지 괜시리 스스로를 탓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독한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도 아침부터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관찰하니 한편으로 기분이 오묘해졌다. 분명 이 버스에 나와 같이 타고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출근길이었을 것이고 그말은 즉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직종에 종사하거나 혹은 재택근무가 가능해도 아직 회사에서 재택근무 방침을 내려주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겠거니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후자였다. 충분히 재택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재택근무 방침이 내려오지 않은 상황이라 여느때와 다를바 없이 출근을 감행하고 있었고 이런 시국에도 직장인의 삶은 어제 오늘 다를게 없구나. 라는 현실을 덤덤히 혹은 씁쓸히 받아들이던 중이었다. 버스안에 타고있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보니 말하지 않아도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듯, 무심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출근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버스 창문에 붙어있던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는데 코로나 발생으로 인해 버스 운행이 단축되거나 중단될 수 있으니 정상화 될 때까지 대체 운행노선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에 나온 동네가 어디지? 궁금하여 즉각 지도검색을 해보니,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불과 몇미터 멀지않은 곳이었다.

 

 

 

 



그러던말던 현실은 나는 출근중이란 것이었고 물론 버스도 매일 방역에 심혈을 기울이겠지만 언제 어떻게 확진자를 접촉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혹여나 내가 탄 대중교통을 함께 이용하게 되진 않을까 등등 불안한 맘으로 출근을 감행중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왠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약간 과장을 더 덧붙여 말하자면 마치 목숨(?)을 담보로 전투적으로 일터로 향하는 일개 병사가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 전염병도 전염병이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늘 눈앞에 닥쳐있는 문제니 말이다. 아무리 코로나일지라도 현실을 피해갈 순 없는 법...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니 그 누구도 불평불만 없이 열심히 맡은 바 일에 충실한 자세로 일하는 모습이 "매우 훈련이 잘 된, 지시에 순수히 복종하는 병사들"을 보는 것 같았다. 혹은 이미 그 시스템에 적응 해서 옳고 그름의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상태가 되어버린 병사들. (잠깐 머무른 곳이었지만 내가 다니던 곳의 부조리한 면들은 다음에 글을 써볼까 한다.) 그 모습들이 퍽이나 대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것은 독함일까 아니면 절박함일까를 생각해보게 됐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물론 현실을 치열하게 부지런히 살아가는건 매우 바른 모습이지만 충분히 재택근무가 가능한 업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재택근무'를 건의해 본 사람이 없어보였단건, 굉장한 희생정신인지 그게 아니라면 소속감에 의해 형성된 집단주의의 단결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무엇인지 난 알수 없었다.


아무쪼록 이런 시국이지만 여전히 아침마다 부지런히 일터로 달려가는 회사의 병사들을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싶다. 내 양쪽 옆자리에 앉았던 나보다 한참 어렸던 두 신입 병사들에게도 꼭 화이팅을 전하고싶다. 뭐 대단한 말은 아니고,


"돈 많이 벌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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