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ves, 2023
 
개요 미국로맨스/멜로 외 감독 셀린 송 출연 그레타 리유태오존 마가로, 문승아 더보기

 

 


 

 


지지리 궁상남인가 vs 로맨스가이인가

그 사이 어딘가의 경계

 

 

여러모로 조금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 없이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확실한건 절대 토종 한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는 아닐것이다. 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셀린 송'이라는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이었으며 내가 절대 토종 한국인 감독이 아닐것이라고 확신했던 이유는 바로 이 영화에서 다루는 주요 키워드와 소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흔하디 흔한 동양적 소재를 다뤄내는 스토리텔링 방법 역시도. 그것은 바로 '인연' 이라는 키워드와 '환생'과 같은 불교적인 윤회사상에 대한 부분, 그리고 또 하나 '첫사랑'이라는 단골 소재였는데  물론 동양에서도 이 흔한 소재들을 가지고 만든 매력적인 여러 영화들이 있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해당되지 않았다' 라고 얘기하고 싶다. 

 

'환생'이라는 주제는 곧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타임슬립 영화와 연결될 수 있는데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시월애', '동감' 이런 영화들이 생각난다. 특히나 이 패스트라이브즈 역시도 로맨스 영화이니, 환생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한국 로맨스 영화중에서 골라본다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작품은 저 두가지이다. 내가 언급했던 두 영화 시월애, 동감과 이 영화의 차이점은 전자의 영화들은 타임슬립을 주제로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로맨스 영화였지만 (공상과학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실제로 시간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는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현실속에서 두 주인공은 본인들의 관계와 의미에 대해서 '인연'과 '환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동양 철학적인 사상으로 깊은 고찰을 나누는 대화들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스토리텔링 방식 때문에 결국은 조금 아쉬운 영화였다. 라고 개인적인 평을 내려본다.

 

동양의 기준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조금은 뻔한 주제들로, 그저 이 소재를 가지고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인물의 모습을 영화 내내 보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이 굉장히 흥미롭거나 참신했다면 구구절절 많은 대화들이 나열되는 구성의 영화라 할지라도 재미있게 보았을 수 있었을법한데 아쉽게도 내 머릿속에는 알수없는 물음표만이 맴돌았던 기분이다. 아마 이 영화는 감독의 개인적인 자전적인 스토리와 경험, 가치관이 깊게 물들어 있는 영화인 것 같다. 유전적으로 한국계 피를 동시에 가지고는 있지만 완전히 캐나다인으로써의 정체성과 정서를 가지고 있는 이방인으로써 그녀가 보는 동양사상에 대한 신비로움과 호기심,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풋풋한 정서까지. 그녀가 지니고 있는 동양 사상에 대한 환상과 첫사랑, 등등 여러 키워드들의 약간은 지루하고 혼잡한 콜라보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혹은 본인의 호기심과 환상으로 버무려 낸 그녀의 소녀감성이 깃든 영화 한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하지면 작품성으로써는 큰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지 않았나. 라는 아쉬운 소견을 남겨본다. 

 

 

 

 

극 중에서 해성과 나영은 천천히 느린 말로 꽤나 많은 대화들을 나눈다. 사실 이들이 나눈 그 많던 대화들 중 그렇게 내게 와닿는 특별한 대사가 별로 없었다는것도 희안한 일이다. '해성'은 한국인 그 자체로 등장한다. 어린시절 같은 학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던 둘은 나영의 이민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둘은 성인이 되어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이 닿게 된다. 그와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영상통화를 주고받으며 랜선연애 같은 관계를 이어가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한국에 와.", "뉴욕에 와." 라며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툭툭 메시지를 던지지만 둘 다 "내가 왜?"라는 건조한 대답을 통해서, 굳이 서로가 각자가 살고 있는 나라에 가야할 어떠한 이유와 연고도 찾지 못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서로의 거리에 대한 비현실적인 관계를 자연스레 인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또 꽤 많은 시간이 흐르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해성과 나영이 다시 만나게 되는 시기는 아마도 그들이 30대쯤 되었을 무렵인 것 같다. 나영의 옆에는 이미 배우자가 있었고 해성은 만나던 여자친구과 '조건이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이별을 경험한 뒤였다. 사실 여기서 이 타이밍도 다소 우스운 타이밍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서로가 각자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었지만 해성이 뜬금 나영을 보기위해 뉴욕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그의 여자친구와의 이별이 꽤 큰 몫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실연을 당한 남자가 또 다시 지나간 과거의 첫사랑을 괜시리 회고하며 기억을 끄집어 낸 것은 이별의 아픔을 잊고자 함과 동시에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나 호기심이 동시에 발휘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옆에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기 위해 떠난 것은 단순 '우정'의 의미로써 였을까?

 

그들이 만나서 나눈 대화들을 보면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회상뿐만 아니라 대학생때 잠시 썸타던 시절에 대한 큰 미련, 첫사랑이라는 아련함 등등 순수하게 그저 우정을 곱씹기 위해서 만난것은 아니라는걸 쉽게 느낄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다지 이 상황이 내게는 그렇게 아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고 그냥 여자친구과 헤어진 실연당한 남자가 대뜸 유부녀인 여사친을 사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보러 왔다. 라고 다소 직설적으로 내게는 해석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영화속에서 아련하고 깊은 사랑을 느꼈던 부분은 나영과 그녀의 배우자 '아서 자터랜스키'와의 관계에서 였다. 그녀와 그녀의 배우자가 침대에 누워 나눈 대화가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는 나영(노라)에게 너가 가끔 자면서 한국말로 잠꼬대를 하곤 하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귀엽지만 가끔 그게 두렵게 느껴지기도 해. 라며, 내가 모르는 언어로 너가 무언가를 말하고, 생각한다는 것이 뭔가 내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것만 같아서 그것이 가끔 두려워. 라고 그가 말하던 장면이 가장 내게 와닿는 한 장면이었다. 짧게 지나간 장면이었지만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특히 해성과 나영의 관계에 엮여있는 스토리들이 꽤나 대단해 보이고 심지어 운명적이고 낭만적이어 보이지만 고작 본인은 나영을 작가 숙소 같은 곳에서 만나 둘 다 싱글이었기에 자연스레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모든게 자연스럽고 다소 밋밋하게 이어져온 관계가, 그들의 스토리(해성,나영)에 비하면 경쟁조차 되지 않는다는 괜힌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모습 마저도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나영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녀를 깊숙히 공감하고 싶어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 해성과 나영의 관계도에 대한 몰입보다, 나영의 남편이 지닌 깊은 공감과 시선에 더 매료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마무리 될 때즘, 해성을 바래다주고 돌아온 나영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터져 그의 남편에게 안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왜? 무엇이? 라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건데, 해성과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아쉬움 따위 보다는 그보다 좀 더 복합적인 감정들, 예를들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의 짧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향수, 정말로 어긋난 타이밍 때문에 놓쳐버린 나의 운명적 상대였을까 라고 혹여나 느끼는 감정들, 우리가 정말로 만났더라면 어떤 인연이었을까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무한한 생각과 질문들이 그녀를 혼란스럽고 다소 괴롭게 했던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 즉 이미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잘 살고있었던 유부녀앞에 난데없이 등장한 '해성'이 꽤 몹쓸짓으로 그녀를 혼란하게 한 것일지도. 실제로 극중에서 해성은 정말로 다양한 '만약에' 화법을 구사하며 이 생이 만약 전생이면, 미래의 우리 관계는 다른 모습일까? 또는 우린 어떤 인연으로 미래에 만날까? 라는 식의 다소 구질구질할 수 있는 미련 멘트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데, 나도 여기서 그의 '만약에' 화법을 빌려와 한마디 하자면, 만약 그가 멋있고 잘생긴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지지리궁상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 온갖 찌질 멘트들을 다 쏟아내고서도 지지리 궁상남이 아니라, 그나마 로맨틱 가이(?)인 것 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수려한 외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무튼 무어라 마무리를 할지. 감독 개인적인 동양사상에 대한 환상 뽕이 많이 취해있는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하긴, 나같아도 유태오같이 생긴 과거 썸남이 다시 나타나서 미련 가득 담긴 온간 멘트들로 내 맘을 마구 훼집어 놓으면 나라도 눈물이 펑 터질지도 모르겠다. 나 잘살고 있는데 괜히 다시 나타나서 나한테 왜이러는데ㅠㅠ 이런 느낌으로다가.

 

 

 

 

 

드라마 대한민국 141분
개봉 2023.11.22.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 군사반란 발생 그날,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26일 이후, 서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도 잠시... 더보기

 
 
 
영화리뷰 처음으로 영화 카테고리가 아닌, 인간/심리/사회 카테고리에 이 포스팅을 적는다. 이 리뷰에서는 영화의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설명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인간상' 이라는 초점에 맞춰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째서 악인들은 죽기전까지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진정한 어른들은 고통속에 살다 단명하는 것일까. 이 영화가 내게 던져 준 가장 첫번째 아이러니한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도 나 뿐만이 아니라 관람한 모든 관객들이 그런 탄식을 했으리라. 역시나 이번에도 느낀 불변의 진실은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매우 쉽고 빠르게 일어나지만 정직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심지어 타락한 인간들을 상대로 꿋꿋하게 정직함을 지켜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https://fancysailor.tistory.com/365

 

길 인간학연구소 - 니체의 선물 (feat:세상에 사기꾼이 많은 이유)

https://youtu.be/wY4bW63lplA " 이상한 건 걔들이 아니라, 나였다. " - 지성은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 주된 힘을 '위장'(변장)을 통해 펼친다. 최근 다소 충격적인 영상을 접했다. 평소에 '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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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가 블로그에 '니체의 선물'이라는 게시글을 올린적이 있는데 그 게시글의 내용이 문득 생각난다. 인간은 원래 그러하고, 그렇게 살아왔기에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있었다 라는 것.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당신이라는 인간이 어쩌면 돌연변이 일 수도 있다. 라는 내용이었다. 타락은 인간의 본능이고 누군가를 해하고 꾀하는 것도 결국 근본적인 생존의 본능과 전략이라는 얘기였는데 그 사상은 내게 꽤나 큰 신선한 충격감을 전해줬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본능을 거부하고 참된 어른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야 말고 성숙한 고지능자에 가까운 인간형이 아니겠는가. 라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었다. 그것이 본능이기에, (말하자면 성악설이라 불릴수 있는)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라는 얘기는 적어도 아닐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지능자, 현명한자, 성숙한자가 되는것이 당연히 타락하고 교양 떨어지며 치졸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되버리는 것보다 당연히 어려운게 마땅하다. 물론 타고나는 성품의 차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인간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누구나 인생의 기로해서 나쁜선택과 좋은선택 사이에서 고민을 해봤을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타락하고 치졸한 인간이라는 것은 약간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좀 더 적정한 예시로 들어 보자면 '포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성숙한 자가 되는 것 보다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 후자가 훨씬 간단하고 쉽고 빠르다. 그렇기에 소신을 지키고 정직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참 어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참 어른들은 언제나 그렇듯 치졸한 무리들로부터 늘 공격받기 일쑤다. 그들이 그렇게 정직하게 그 자체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게끔 가만히 두지 않는다. 이것이 질투인지 뭔지 정확히 잘 알수 없지만 질투심과 더불어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과 정 반대인 누군가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가 아닐까 싶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런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가지고는 있지만 절대 쉽게 넘어오지 않는 그들에 대한 어떤 분노와 열등감이지 않을까. 쉽게 말하면 자신과 다르게 반듯하고 우월한 멋진 누군가를 보면서 이유없이 증오하고 괴롭히고 싶은 수작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도 '전두광'이라는 캐릭터가 '이태신'에게 슬쩍 자신과 같은 배를 탈 의향이 있는지를 떠보는 장면이 나온다. 즉 "같은 편 만들기"를 시도 해 보지만 역시나 이태신에게는 어림도 없는 제안이었고 "육군은 모두가 같은 편입니다."라는 말만 돌아 올 뿐이었다. 이 장면에서 전두광의 표정을 보면 자신과 완전히 다른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그 이질감, 혐오감, 분노 등등 이런 모든 감정들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짓는걸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모두가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이므로, 언급하자면 슬프게도 악의 무리가 승리하는 이야기다. 흔히 영화 드라마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해피엔딩들을 자주 보지만 이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 마음 아프게도 정의가 악의 무리를 소탕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악한 인간이 권력을 쥐거나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 중 하나인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스트가 사회의 우두머리 집단에 많이 분포해 있다는 심리학적인 분석이 꽤나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들을 정리해보자면 아마도 아래와 같지 않을까.
 


 
 
1. 이타심 결여 (이기주의)
2. 목표를 향해 물불 가리지 않는 무모함과 추진력
(목표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나쁜행동 일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3.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결여

4. 현저히 떨어지는 도덕성과 죄책감에 대한 감각

5. 근본없는 자신감 혹은 자기도취 (즉 자기객관화 어려움)
 


 
 
일단 기본적으로 그들은 이타심이 없으므로 본인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인간으로써 이타심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많은 것들을 동시에 고려하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피해를 보지는 않을지, 나의 행동과 결정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객관화를 수시로 시도하지만 반대로 악인들은 그런 의의를 따지지도 않을 뿐더러 애시당초 목표 설정 자체에도 결이 다르다. 흔히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소유욕, 권력욕, 물욕 등등 모든 쾌락에 대한 욕구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뿐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그리고 자신의 목표가 어떤 의의가 있고 어떤 이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사회에 어떤것을 이바지 할 수 있는지 등등 이타적인 목표 설정은 조금도 없기 때문에 주변 환경과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내게 도움이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조금 설득하면 넘어올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렇게 자기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로 조직을 구성할 뿐. 우스운것은 그렇게 하고나서도 그런 악인들의 조직은 늘 내부 갈등이 일어나기 일쑤라는 거다.  (그들끼리도 서로 언제 등쳐먹을지 모르는 얄팍한 관계와 의리). 애초에 그들이 형성하는 인간관계라는것이 그저 힘의 서열과 정치질 그 뿐이니 말이다.
 
 
 

 
 
 
어느 세상이든 선과 악은 늘 공존하고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도 완벽한 선, 완벽한 악은 없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성숙하고 참된 어른이란것은 결국 어떠한 현혹 속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팍팍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점점 더 많은 '포기현상'이 나타날것이다. 아까 말했듯 성숙하고 참된 어른이 되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 길은 꽤나 많은 노력과 인내심과 성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악인은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과 악 중간에 있는 평범한 대중들이다. 힘의 방향에 따라 충분히 어느쪽으로든 설득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사회가 팍팍할 수록 더욱 더 범죄나 혐오, 사기가 판을 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기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악인이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 팍팍한 사회는 우리를 더욱 이기적으로 만들고, 더욱 더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물불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결국 이타심, 양심, 도덕 이런것들을 죄다 벗어던지고 당장의 '나의 이익'에만 불을 켜게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옹호하고자 하는것은 절대 아니다. 어찌됐건 범죄는 범죄이고 악인은 악인이므로 모든 나쁜 행위들에 그 어떤 이유와 합리화도 적용될 수 없다. 단지, 팍팍한 사회는 내가 아까 말한 선과 악의 그 중간에 있는 대중들을 좀 더 악으로 몰아가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세상이 어떤 모습이든지간에 나 자신은 절제력을 잃지 않는 '선'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그만큼 싸워나가야 할 적대적인 세력이 늘 도처에 깔려있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쉽지않은 일이다. 적대적인 세력이라는것이 이 영화에서 처럼 뭐 대단한 적군을 뜻하는게 아니라,  이것은 그냥 우리의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가족, 친구, 직장 이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쉽게 내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런 외부 환경으로부터 나쁜 영향력을 받지 않고 건강한 마인드셋을 한다는 것이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속에서는 정말로 더 쉽지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인이 될 것인가? 그렇게 쉽게 나 자신을 놓아버리고 형편없는 수준의 인간이 될 것인가? 라고 물음을 던졌을 때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통제력을 잃지 않고 타인을 공감하면서 살아가다보면 훨씬 아름답고 큰 세상이 되어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이타심 따위도 너무 거창하다면 그냥 어찌됐건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마인드셋은 "남에게 피해주지말자"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세상의 모든 레슬리에게

 

 
레슬리에게 To Leslie, 2022 제작

요약미국 드라마 2023.11.29 개봉 15세이상 관람가 119분 감독 마이클 모리스 출연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마크 마론엘리슨 제니오웬 티그  더보기 줄거리“말해주세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술에 빠져 수억의 복권 ..더보기

 

 

 

심각한 알콜 중독에 빠진 한 여성이 등장한다. '레슬리'. 첫 장면은 아마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엄청난 복권에 당첨되어 한껏 들 뜬 그녀의 모습으로 영화는 화려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가장 우울하고 처참한 모습의 주인공이 모습이 시작된다. 그녀는 심각한 알콜중독에 빠진 여성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이러스 마냥 취급하며 기피한다. 그녀가 이렇게 알콜중독으로 인생 나락으로 가게된 것은 다름 아닌 '마약'. 마약으로 당첨금을 몽땅 날려버린 그녀는 어린 아들의 양육마저 뒷전으로 한 채 말 그대로 타락한 인생을 살며 도저히 구제되기 힘들어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른다.

 

 

 

초반부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불쾌함 그 자체였다. 간신히 장기 투숙하며 살아가던 모텔인지 여인숙이라 불러야 될 지 모르겠는 후미진 곳에서 마저 밀린 월세로 쫓겨나게 된 그녀는 갈 곳을 잃자 결국 아들을 찾아간다. 아들은 레슬리가 앞으로의 삶의 "계획"을 세우는과정까지는 흔쾌히 함께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노라고 선의를 베풀지만 정신나간 그녀는 아들의 호의에 뒤통수라도 치듯, 그새 술 먹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아들이 비상금마냥 고이 묵혀둔 돈에 손을 대고 일을 저질러 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 신물이 난 아들은 엄마인 레슬리를 결국 경찰에 신고하며 어릴 적 엄마 대신 자신을 길러주었던 이웃 어른에게 어쩔 수 없이 연락하여 그녀를 데리고 가도록 부탁한다. 레슬리 아들의 나이는 고작 2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

 

이 초반 전개를 보면서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긴 도저히 어려웠다. 그야말로 가정학대 그 자체였고 사실 영화에서는 레슬리가 무엇때문에 어떻게 왜, 마약에 빠져 모든 당첨금을 홀라당 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이해할수도, 아니 이해할 건덕지라고는 1도 없는 상황. 그냥 어마어마한 복권에 당첨되어 한 껏 황홀감에 취한 레슬리는 그저 향락에 빠져 본인의 인생을 나락으로 스스로 내몰았다 정도로 추정 가능한 상태였다. 아무튼 가정폭력, 학대에 대해서는 무슨 원인이 있었다 한들 절대로 옹호할 수가 없는, 말 그대로 그녀는 쓰레기같은 인생을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가는 캐릭터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인물의 등장으로 그녀는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를 맞게 되고, 물론 우여곡절을 겪어나가긴 하지만 그는 그녀가 다시 마음을 잡고 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아주 지대한 영향력을 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레슬리에게 새 인생을 살아나가게끔 큰 영감을 준 두 인물은 단연 그녀의 새로운 연인이자 남편 '스위니'와 그녀의 아들이다. 사실 극 중 '스위니'는 내가 생각할 때 매우 전형적인 '이타적인' 인물 그 자체다. 말하자면 에코이스트라고 해야될 지 모르겠으나 처음에는 왜 그가 그녀에게 무한한 호의를 베풀어 주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영화속에서는 스위니와 모텔 주인이 우연히 레슬리의 캐리어를 길에서 줍줍하고 그것을 마음대로 헤집어 본 거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녀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라는 식으로 납득이 되게끔 설명하였지만,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준 것 정도의 호의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뒤에도 그녀의 다소 무리한 말도 안되는 부탁 (월급 가불 신청 및 개인적 지출을 위한 돈 요구 등등)  마저 호구마냥 베풀어 주던 그의 모습은 약간은 아이러니한 상황. 

 

영화 후반부로 갔을 때 그의 그런 행동들은 그의 엑스 와이프와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던 레슬리를 보며 그가 느낀 연민, 안타까움 등등으로 인한 호의와 사랑 이었다고 설명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 그가 얼마나 이타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인가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이런 '천사'같은 인물의 등장이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스럽고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가장 현실적이지 않았던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스위니'의 등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늘상 고주망태 상태에 마약에 찌들었던 전적까지, 말 그대로 그냥 '미친x'이라고 불러도 이상할게 없었던 그녀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고 애정을 주고자 하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현실에 도대체 얼마냐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영화적인 감수성이라 할 만한 것은 이런 사랑을 받았을 때 감사하며 새 영감을 얻고 새 삶을 살아나가는 결말이 현실에서도 쉽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망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조건 없는 사랑이나 호의를 받았을 때 오히려 더욱 불안해 하기도 하고 불신하며 상대를 테스트해보고 간보고 분노하기까지 하며 괴롭히는 경우가 오히려 다반사다. 물론 이 영화속에서도 레슬리가 결국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이웃들을 통해 그의 앞에서 여실히 들통나게 된 상황에서 결국 그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떠날 것이라는 짐작으로 인해 그를 거부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등장하긴 했지만 그 갈등 역시도 다행히 잠깐의 트러블 정도로 마무리 된 것이 아주 영화적인 요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녀가 새 인생을 살아가는것에 대한 큰 영감을 얻은 두번째 인물은 바로 그녀의 아들 '제임스'다.  그녀는 새 썸남이자 애인 '스위니'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당하고 그와 트러블을 겪고 상심해 있었지만 매우 이타적인 인물인 스위니는 그녀가 복권에 당첨됐을 당시에 tv에 출연했던 비디오를 가지고 와서 틀어주며 그때 그녀가 했던 말과 행동, 그녀가 얼마나 아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었는지를 상기시켜주기 위해 그는 나름의 노력을 한다. 바로 그의 노력으로 인해, 그녀는 그 비디오 속에서 아들이 무심코 했었던 말에 영감과 힌트를 얻어 새 삶을 꾸릴 상상과 기대에 가득찬 상태로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그녀의 인생에 나타난, 이타적인 스위니라는 인물의 기적적인 등장. 이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으로 개인적으로 꼽는 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다소 억지스럽거나 과한 연출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감동이 이 영화의 큰 매력인 것 같다. 초반부에는 레슬리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그녀를 혐오하고 비난하게 되지만 결국 후반부로 가서는, 비록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망가진 인생을 살아왔던 그녀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한줄기 희망을 찾는 모습,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 줄 아는 모습, 그러한 모습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를 애정으로 '연민'할 수 있게 할 수 있었던 부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모든걸 포기한것 처럼 행동한 그녀였지만 이 영화의 포스터에 적혀있는 글 처럼, "말해주세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라고 그녀가 나즈막히 흐느끼면서 내뱉었던 말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한번 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타인에게 간절한 듣고 싶어하는 한마디 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녀가 변화에 대한 일말의 노력 없이 단순 타인의 환심만을 쉽게 얻고자 저런 말과 행동 했다면 또 재생불가한 '쓰레기'에 불과했을 것이나, 어쨌든 영화는 다행히도 그녀의 아름다운 변화의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간절함 섞인 한 마디는 꽤나 가슴 후빌만한 호소력이 있었던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나 한번쯤 내가 인생의 바닥에 있다고 여겨지는 몇몇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그냥 거기서 다시 처음부터, 작은 것 부터 시작해도 인생은 그 서사 자체로 살아 갈 가치가 있는 것을. 이라는 메시지를 느꼈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 주인공 레슬리처럼 가족과 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고 자식을 학대하며 마약에 찌들어 인생을 나락 보냈던 수준의 캐릭터까진 아니지 않은가. 그랬던 그녀가 아주 작은 영감에 힌트를 얻어 새 삶을 살아나갈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가는 과정은 거창한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냥 거기서, 바로 그 시점에서 다시 조금씩 하면 돼. 라는 식의 소탈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것 같아서 정말로 광광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몇번을 참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인생인가가 아니라, 그동안의 내 삶의 서사 안에서 나는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여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사실에 집중해야 하는것이 우리네 삶이 것이다.

 

 

 

 

 

 

팟 제너레이션 The Pod Generation, 2023 제작

요약영국 코미디 외 2023.10.03 개봉 12세이상 관람가 109분감독소피 바르트출연에밀리아 클라크치웨텔 에지오포로잘리 크레이그비넷 로빈슨  더보기줄거리임신/출산 2.0이제는 팟이 대신 낳아드립니다. 기술이 자연을 능가하게 ..더보기

 

팟 제너레이션

Daum영화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movie.daum.net

(다음 포털 별 평점을 보니, 말도 안되게 별점 테러한 사람이 있던데 개인적으로 그 평점은 절대 이해할 수가 없음.) 

 

 

오랜만에 굉장히 인상깊은 영화를 하나 감상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팟 제너레이션". 말 그대로 자연적 출산이 아닌, 인공지능 알을 통해 아기를 만들고 출산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사실 요즘 내가 SF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더이상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마냥 공상과학속에서만 머무르는 소잿거리가 아니라 충분히 우리 일상속에 실현 가능한 소재로써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Her를 봤을 때도 일상속에 스며든 인공지능과의 러브스토리가 굉장히 인상깊었던 것 처럼 이 영화 역시도 우리 일상 깊숙히 들어온 인공지능 세상의 모습을 매우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은 똑부러는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한다. 그의 남편은 딱히 그렇다할 수익은 없지만 식물학자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있다. 주인공은 회사로부터 '자궁센터'의 복지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매우 관심을 갖게 되지만 한편으로 '자연적'인 임신 방식을 원하는 남편의 눈치가 보여 몰래 자궁센터를 방문하고 설명을 듣고 온다. 그러나 결국 남편에게 고백하게 됨으로써 둘은 인공적인 임신과 자연적 임신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발생하지만 결국 남편을 설득하게 되고, 그들은 인공 출산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엄마의 자궁 역할을 하는 기계의 이름이 바로 '팟'이다.

 

 

 

 

그녀는 '팟'으로 아이를 출산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도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악몽을 꾸기도 하고 여러모로 심란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며 다소 평소보다 떨어진 생산성에 대해 회사로부터 지적받게 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인간의 생활 깊숙한 곳에 AI 시스템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든 스케쥴과 그 날 입을 옷 등등 사소한 사생활 일부까지 모두 관여하는 그녀의 AI는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오늘 그녀의 컨디션과 기분이 어떤지, 요즘의 그녀의 에너지와 생산성이 어떤지에 대해 모두 파악이 가능하다. 그렇다보니 심리상담의 영역에서도 AI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녀는 심란한 마음의 원인과 이유를 찾고싶은 마음에 AI 심리상담가를 찾아간다. 이 장면 역시도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대게 AI 시대가 초래함에 앞서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일 것이라고 자부했던 예술이나 심리 상담 등등 감성이 스며들어 있는 직업군은 AI로 쉽게 대체되지 않을것이라고 사람들은 자부했지만 실제 AI 세상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미 미술이나 문학 음악 등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 AI는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고 그 외에도 심리상담이나 철학가, 종교인의 영역 까지도 어쩌면 AI가 인간보다 더 우월하고 우수한 통찰력으로 방향성과 문제 해결을 제시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전문가들의 그런 예상을 정확하게 예로 들어주는 아주 적절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이 생김새 섬뜩한 외눈박이 AI 상담사는 주인공의 원인 불분명한 불안한 마음을 잠재워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편리함을 제공하는 줄로만 알았던 '팟'이라는 인공 자궁 시스템에도 여러 불편이 따르는 장면들이 등장했다. 여성의 임신으로 인한 경력단절, 신체적 변화, 호르몬 변화 출산 후 후유증 등등 임신이라는 것 하나에 따르는 여러 희생과 불편함들을 모두 제거해주는 '팟'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자궁센터'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대기자들이 이 팟을 대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팟을 어느정도 자유자재로 지니고 다닐 순 있었지만 완전히 100%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부부는 출산일이 임박해오면 집에서 하는 가정출산을 원했지만 자궁센터에서는 그것을 거부하였고 많은 대기자들 때문에 팟을 다른 고객에게 다시 대여를 해줘야 하므로 기기 손상이나 훼손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부는 자궁센터의 통제를 완전히 거부했고 그러자, 자궁 센터는 팟을 키우는데 필요한 리모콘 앱 시스템을 원격으로 연결 해제 해버린다. 사실 이 앱

은 팟을 키우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계장치인데, 팟을 통해 아기에게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팟과 연결된 시스템 장치를 조종하는 아주 중요한 기기라고 볼 수 있다. 아기에게 영양분을 먹일 시간을 알려주기도 하고 모든 통제 기능이 이 앱에 연결되어 있는데, 자궁 센터는 부부의 출산일을 몇일 앞두고 연결 기능을 완전히 해제해버린다. 하지만 부부는 어차피 곧 출산일이 임박한것을 알고 자궁센터에 가지않고 원래 그들이 원했던 방식으로 집에서 자연 출산을 시도한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은, 인공적인 출산 방식을 선택한 그들이지만 아기와의 유대감 형성 이라든지 가정 출산을 하고싶어하는 점 등등 자연적인 방법들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깊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시사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앞서서 우리는 천천히 AI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분명히 다 해결되지 않을 갈등이 존재할 것이며, 그 간극을 어떻게 어떤식으로 밸런스 조절을 하며 현명하게 대처 할 것인지, 바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그런 숙제들을 넌지시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또 한가지, 영화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이 '팟'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극 페미니스트들은 팟의 등장을 환영할 줄 알았는데.." 라는 대사가 있는데 나 역시도 이 부분이 의문스러운 점이다. 영화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왜 이 인공지능 자궁 시스템을 강력이 반대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나오지 않았는데 이 장면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왔다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영화속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왜 AI 자궁을 거부하였는지에 대해서 그렇다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팟을 만든 최초의 설계자, 대표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터뷰어에게 이 대표자는 "팟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하자 인터뷰어는 "산모와 부부들이요?"라는식으로 대답하지만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오, 바로 아기들이 주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팟의 주인공은 부모들이 아니라 아기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아기들이 부모님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겠죠. 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난다. 사실 아기는 부모로부터 그들의 유전자를 물려 받음으로써 탄생하게 되는 존재들인데 이것이 거꾸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떤 구조와 시스템이 그것을 실현가능하게 한다는 것인지 굉장히 큰 궁금증을 남기며 끝이 났다. 

 

굉장히 소재적으로 신선함 그 자체였고 심지어 이 팟은 남자의 유전자 없이, 여자의 유전자 만으로도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즉 동성애 커플이나 부부들도 이 팟을 통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노고에서 해방된 미래 AI시대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물론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연 임신을 하는 여성들이 등장했지만 사실 이 '팟' 시스템은 꽤나 비싼 가격이므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팟'을 통해 임신 한다는 것은 사실상 영화속에서 상류층을 의미 하기도 했다. 아무튼 자연적 임신과 인공적 임신이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의 미래 세상을 미리 엿보고 온듯한 독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I DREAM IN ANOTHER LANGUAGE :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하여 보게되었다. 2019년작이다. 영화의 기본 정보나 스토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무작정 보게 되었다. 영화 초반부를 감상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고대 토착 언어 '시크릴어'를 기록하고 남기기위한 언어학자의 고군분투나 여정을 그린 영화인건가? 하는 생각으로 계속 감상했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소재가 등장하여 꽤나 놀랬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는 '시크릴어' 라는 소수 언어가 등장하고 거기에 또 하나, '두 남자의 사랑' 이라는 동성애 코드 즉 성소수자 라는 코드가 더해지면서 소수언어+성 소수자 라는, 희귀함에 또 희귀함을 더한 주제가 꽤 독특하다. 단순 '퀴어영화'라고 구분지을 수도 있지만 '시크릴어'라는 소수언어와 그 언어가 갖고 있는 문화적 배경,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새소리 등등 여러가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발하는 요소들이 전달하는 이미지들이 강해서 단순 '동성애'를 그린 영화인가? 라고 했을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느낌을 그려내는 영화인 것 같다.




극증에 등장하는 '에바리스토'와 '이사우로'는 시크릴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원어민이다. 이들은 어린시절부터 단짝이었다. 그러나 한때 단짝이었던 사이가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말 한마디 섞지 않은채로 떨어져 지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언어학자 '마르틴'은 시크릴어 연구를 위해 이들의 화해를 적극 추진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생각보다 둘의 갈등의 골을 좁히기가 여간 쉽지않다. 우연히 에바리스토의 손녀딸 '루비아'에게 둘의 사연에 대해 듣게 되는데, 젊은시절 두 사람은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로인해 큰 다툼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승자는 '에바리스토'였고 싸움에서 진 '이사우로'는 홀로 외딴 오두막에서 외로운 여생을 보냈다는 것인데...그렇다고 젊은날 한때 크게 다투었던 일이 여지껏 철천지원수마냥 5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서로 외면할 정도였을까? 마르틴은 여전히 의구심을 가진채로 어떻게든 두 노인 사이의 갈등을 좁힐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르틴은 에바리스토의 소녀딸 루비아에게 진짜 숨겨져있던 두 노인 사이의 비밀을 전해듣게 되는데, 내가 말한 생각치 못했던 전개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결론적으로 오랜세월 비밀스레 숨겨져있던 두 노인의 비밀은, 바로 그 두사람은 젊은시절 뜨겁게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종교적 갈등을 겪었고 결국 한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자신을 회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여성은 미래의 에바리스토의 부인이었으며, 그녀는 이 두 남자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미 다 알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바리스토를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를 종교적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에서 존재하는 '시크릴어'가 실제로도 존재하는 언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언어가 갖고있는 역사적인 배경은 굉장히 신비스러운 분위기들을 갖추고있다. 극중에서 말하길, 태초에 여성은 '새' 였다고 한다. 어느날 이 새는 땅을 걷는 최초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남자도 새를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쓰는 언어가 달라 서로 맺어 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새는 남자에게 밀림 속 만물의 공용어인 시크릴어를 가르쳐 주었고 이 둘의 결합으로 태어난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 그 이후 세상에 번성한 인간과 동물들은 모두 시크릴어를 쓰게 되었다는 신비로운 우화같은 이야기. 이것이 바로 시크릴어의 탄생 배경이라고 영화에서 설명한다.

아무튼 이 희소성 뛰어난 '시크릴어'와 '동성애' 혹은 '양성애'라는 소재는 꽤 서로 닮은면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감독은 이 두 남자의 동성애 또한 시크릴어와 같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그 무엇으로 표현하고 싶었던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감정에 언제나 솔직했던 이사우로와 달리 에바리스토는 늘 그에게서 멀어지려했고 자신의 어린 지난날의 감정에 대해 끝까지 극구 부인하며 꽁꽁 숨기기를 원했다. 글쎄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극중 인물의 감정에는 깊이 이입할수는 없었지만 그저 친구로써 쌓아온 우정의 감정 까지도 마치 절대 건드려선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깊숙히 파묻어 버리려고 애쓰는 에바리스토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다. 일생의 대부분을 살고 다 늙어버린 노인이 되어서도 끝끝내 진실된 마음을 꺼내지 못한 에바리스토. 이사로우가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에바리스토에게 남긴 유언이 머릿속에 남는다.



"잘있게 친구여 소중한 내 친구여 그동안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은 말하지 못한 채로 남겠지만 이상향에 가거든 그것들을 곱씹겠네 그리고 자네도 생각하지 친구여 소중한 내 친구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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