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혼자있는 시간의 힘> 

by 사이토 다카시 

 

 

 

벌써 코로나 시대 3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길어질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 과정에서 백신접종, 백신패스 등등 코로나로 인한 새로운 정책들이 많이 시행됐는데 그 정책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또 한편으로 반대하는 소수 집단들도 존재한다. 어쨌든 이 책은 그 소수집단(?)에 소속이 되어 의도치않게 혼자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나를 위해서 친한 동생이 생일 선물로 보내준 책이었는데, 지금같은 코로나 시대에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혼자 있는 시간을 유연하게 보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위로나 지침서가 되어줄만한 책일까? 라는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대했던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내가 고작 이 책 한권으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 파악할 순 없겠지만 책의 초반부를 읽는 내내 '고독'의 시간을 건강하게 잘 보내는 방법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이 '나르시즘'적인 감성에 심취하여 자신의 수준은 높이 사지만 타인의 수준은 깎아내리며 배척하고 쉽게 어울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런식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버텨내며 자신에게만 시간을 투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공에 바람직한 방법인 마냥, 마치 성공한 아웃사이더가 외톨이 였던 시간들을 부정하고 그것이 대단한 '멋' 이라도 되는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진짜 성장은 혼자 있을 때 가능하고 최소 무언가를 학습하는경우에도 스스로 공부하고 이루는 것이지, 누군가 알려주고 가르쳐줄 순 있지만 결국 그 누구도 대신 해 줄순 없는 것 처럼 말이다.  근데 저자가 초반부에 얘기한 고독한 시간은 뭔가 스스로에 대한 선민의식에  비롯된 생각이 많아 보였고 그런 방식의 타인과 거리둠은 그다지 긍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작가는 '자기력'이라는 단어를 얘기했는데,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힘 그것을 자기력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작가는 어린 시절 "나는 이대로 끝날  사람이 아니야.","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라는 생각으로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하지만 남을 미워하거나 혐오하진 않았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묻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거만함으로 분출되고 있었고 물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고 본인도 말하지만 그런 기분이 뭔지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역시 작가의 강한 나르시즘이 느껴졌다. 내가 기대한 책의 내용은 타인과 단절하고 '고립된' 시간을 잘 보내기 따위가 아니라, 타인과 잘 소통하면서도 내게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기 같은 얘기들을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다보면 마치 집단에 잘 소속되고 대인관계를 잘 하는 사람들은 개인이 추구하는 성공이나 혹은 사회적 성공을 이뤄내기 어려운 것 처럼 단언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이 꽤나 나를 불편하게 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높은 단독자는 담합으로 자신의 입찰 가격을 낮게 책정하지 않는다."

"높은 기대치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기력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힘은 '젊음'이라고 생각한다."

 


 

 

위 내용은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 마라' 라는 챕터에서 발췌해온 글이며, '담합'을 나 자신에 대한 '입찰' 가격을 낮게 설정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 하는 것 부터가 저자의 '오만함'을 느낄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마라. 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모두에게 사랑 받으려고 너무 피곤할 정도로 애쓰지마라. 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뜻은 담합을 함으로써 자신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짓을 하지 마라. 뭐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도대체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라는 의문만 남는 책이다.  뭐가됐든 작가는 그런 자기도취 스러운 오만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자기 성장의 주축 에너지 였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았다. '자부심'과 '자만심'은 한 끗 차이인것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좋지만 그 저변에는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깔린 것이라면 과연 그것을 긍정적인 에너지라고 볼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잘 모 르겠다. 

 

그리고 그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 3가지를 말했는데 1.눈앞의 일에 집중한다 / 2.원서를 읽거나 번역을 해본다 / 3.독서에 몰입한다. 이 세가지중 3번째 독서에 몰입한다 부분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주로 고전 소설이나 철학도서들을 즐겨 읽었는데 니체를 읽으면서 정신적 멘토로 삼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고 그들도 본인에게 호의적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내용이 나왔다.

 

 


 

"나는 책이 마음에 들면 '내가 책(그들)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나를 이야기 상대로 아주 흡족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분명 대화를 나누면 즐거웠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앞서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자아도취성 발언에 또 한번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돌아가신 니체는 아무런 생각도, 이 책의 독자가 누군지 따위도 알지 못했을텐데 그들에게 자신이 선택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말에 조금은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무튼 이 나르시즘 충만한 내용이 책의 초반부 부터 등장했고 겨우 몇 십 페이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미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선물받은 책이기도 해서 끈기를 갖고 좀 더 읽어 보았다. 결론적으로 혼자있는 고독한 시간을 유용하게 잘 활용한 여러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 어떻게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뜻깊게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 책의 거의 끝 부분에는 외로움, 고독과 싸워 이겨내는 주제의 소설책 여러권을 서너 줄 넘짓한 짧은 글로 추천하는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냥 좀 담백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는지에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러면서도 쉽게 우울에 빠지거나 고립되지 않는, 건강한 밸런스 맞추기에 대한 얘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나 작가의 '자기애' 충만한 사상이 은근슬쩍 내포된 책일거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고 혹시나 이 책 역시도 그가 스스로 얼마나 수준이 높고 교양이 있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나는 나의 고독한 시간을 이렇게 우아하게 잘 보냈다 라는 자기 자랑질을 목적으로 출간한 책은 아닐까 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본다. 

 

 

 

 


이 책은 내게 너무나 낯익은 책이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시집부문에서 워낙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책이기도하고 직간접적으로 이 책을 종종 접해왔었기에 사실은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이 책을 제대로 한번도 펼쳐본적이 없었다. 그동안 소설책이나 수필집은 종종 사면서도 시집을 돈 주고 사봐야지 라는 생각은 별로 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요 근래 어느날 서점에서 문득 이 책을 또 발견하게됐고 드디어 처음으로 이 책을 펼쳐 읽어보게 되었는데, 나는 여지껏 이 시집이 '류시화'님의 직접 쓴 창작시인줄로 당연히 알고 지내왔건만, 사실은 이름 모를 시인, 예술가, 철학가 등등 혹은 평범한 대학생까지 작가를 알 수 없는, '작자미상'의 아름다운 글들을 하나로 모아둔 시집이었다는 점. (나혼자 엄청난 뒷북)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지칭하지 않는 사람들의 창작을 가끔 더 아름답고 고귀하게 여길때가 있다. '예술' 이라는 것의 진정한 가치는 말 그대로 진실됨과 진정성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가 아닌 창작자들의 작품이야 말로 사실은 가장 순수함에 가까운 예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이름 모를 누군가들의 잠언 시집이라는 부분이 어쩌면 내 마음을 더욱 심쿵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구절들은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핑 돌고, 아예 눈물이 흘러내리기도하며, 아 이제 시집을 읽으면 눈물이 흐르는 나이가 된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냥 최근에 겪었던 크고 작은 여러가지 힘들었던 일들로 인해서 감수성이 많이 예민하고 야들야들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나는 올해 연말 꽤나 뒤숭숭했던 마음들을 그나마 이 책을 통해서 위로받고 조금이나마, 아니 잠시나마라도 평온을 찾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이 어떻게 이렇게 오랜시간동안 꾸준히 독자들에게 사랑 받아 올 수 있었는지,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냥 그럴싸하게 써내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한철 훅 타오르다 사라지는 유행 가사들 따위가 아니라,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또 20년, 30년이 지나서도 다시금 이 책을 들여다본다면 그때는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오겠지. 혹은 그게 아닐지라도 마치 심신이완제처럼 각박한 현실에 치이고 다칠 때, 마치 긴급하게 내 마음에 수혈이 필요하다 싶을 때, 왠지 그럴때마다 꼭 한번씩 펼쳐보고 싶은, 인생 '잠언집'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한 자 한 자가 소중한 귀한 많은 잠언 시들 중에서도 내가 특히나 감동 받았던 시가 몇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한가지를 아래에 가져왔다.

 


 

'짧 기간 동안 살아야 한다면'



만일 단지 짧은 기간 동안 살아야 한다면
이 생에서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찾아보리라.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확실히 말하리라.
덜 후회하고 더 행동하리라.
또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모두 불러 봐야지.
아, 나는 춤을 추리라.
나는 밤새도록 춤을 추리라.

하늘을 많이 바라보고 따뜻한 햇빛을 받으리라.
밤에는 달과 별을 많이 쳐다보리라.
그 다음에는
옷, 책, 물건, 내가 가진 사소한 모든 것들에 작별을 해야겠지.
그리고 나는 삶에 커다란 선물을 준 대자연에게 감사하리라.
그의 품속에 잠들며.


작자미상(여대생)

 



'대자연에 감사하리라' , '그의 품속에 잠들며' 에서 거의 이 시가 전달하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얼핏 화자는 삶을 매우 허심탄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얼마나 삶을 감사히 생각하고 지극히 애정하고 있는지를. 그 마음이 깊숙히 느껴져서 나 또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은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내게도 주어진 시간과 삶을, 어떻게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 이름모를 작가의 아름다운 글을 통해서 많은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건 영원하지않고, 모든건 결국 지나가리라.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면서 결국 지금 내가 가장 크게 고통받는 있는 부분들 또한 그저 '별 것 아닌 것'이 되버리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요즘 시시콜콜하게 유튜브에서 우연히 명상 영상을 본 적 있는데, 그 중에서도 '죽음명상'이란 것을 해본 적이 있다. 뭐 대단히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냥 자기전에 침대에 가볍게 누워서 귀에 버즈를 끼고 가만히 죽음명상에서 흘러나오는 나래이션에 집중하는 것인데, 그 명상의 목적은 아마도 당장 내일 내가 죽는다는 상상을 했을 때 지금 내게 닥친 시련과 혹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 나를 분노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고 사소한것에 불과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 뭔가 초월적으로 상상을 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나의 고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는 효과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마치 그런 것 처럼 '짧은 시간 동안 살아야 한다면' 이라는 시가 내게 전달해준 이미지도 바로 이 '죽음명상'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죽음명상이 좀 더 초월적이고 마치 해탈에 가까운 느낌이라면, 시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좀 더 인생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엔 정말로 미련도 후회도 없이 엄마처럼 포근한 자연속에서 생긋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을 것만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들이 그려졌다. 그래서 눈물이 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너무 아름답다고 여겨져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두번 읽게 되었다. 실제로 작가가 자신에게 상담받았던 내담자들의 사연을 예로 들어 심리학적 분석을 설명하고 이야기하는데, 타 심리학 도서들처럼 어려운 전문용어가 자주 등장한다던지 그래서 내용을 이해하기에 시간이 다소 걸리거나 그런 불편함은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편하고 읽기 쉽게 쓰여있다.

책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주제는 '의존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에서는 '성에사는주민'과 '마을에사는주민'으로 빗대어 이를 표현했는데 독립적이긴하나 지나치게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절대 함부로 자신의 맘을 내비치지 않는 큰 성벽을 쌓고 사는 주민, 반대로 남들과 사교적으로 잘 지내는것 같지만 지나치게 타인 의존적이며 남들의 평판에 예민하여 수시로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마을에 사는 주민. 이렇게 두가지로 분류하여 표현하였다.

결국은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어느 한쪽도 심각하게 치우치지않은 적당한 밸런스 유지가 최선임을 얘기하고있고, 문득 저 얘기를 들으니 유명한 작가 겸 방송인 '허지웅'님이 생각났다. 그가 종종 티비에 나와서 어린시절의 힘들었던 경험들을 펼쳐내며 자기 자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하지 않은게 없었고, 혼자서 모든걸 처리하고 해결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혼자서' 모든걸 해왔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오기도 했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누구에게도 도움 요청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할 수 없었을수도있고 하지 않은걸수도 있지만) 타인에게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걸 해결하며 살아온 삶이 그렇게 대단하고 멋있는것만은 아니었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게 생각났다. 토씨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대충 떠올려 보자면 그런 의미였다.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나는 극단적으로 혼자서 벽을 쌓는 사람도 아니며, 또 너무 타인에 의존적이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인간으로써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 역시도 극단적으로 성벽을 쌓고 살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꽤나 고립되고 외로운 생활을 했었고 뭐가됐든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지는 패턴은 정서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혼자서 완벽하게 모든걸 처리하려는 행동이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하고 멋있는 일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타인에게 절대 기대지않아' 라는 고집 때문에 누군가 내게 도움을 청할 때 그 도움의 자세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를 민폐라고 여기거나 매우 냉소적이게 될 수 있다.



'홀로서기란 의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시작되며,
독립과 의존 욕구 사이에서 서핑하듯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건강한 의존이란 부족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부분에 관해 힘 있는 사람에게 정확히 도움을 요청 하는 것'

'객관적인 의존은 나와 타인 모두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두번째 화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류시화님이 쓴 책 '날아가는 새는 뒤돌아 보지 않는다' 에서도 언급됐던 내용이라 괜히 반가운 맘이 들었다. 즉 책에서 말하는 것은 '감정은 죄가 없다. 감정에 대한 나의 감정이 문제일 뿐' 이라는 말로 짧고 굵게 핵심을 전달했다. 슬픈마음, 화나는 마음, 억울한 마음 모든 감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의도치 않은, 예기치 못한 말이나 상처를 외부로 부터 받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첫번째 화살이지만 그 첫번째 화살을 느끼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두번째 화살을 쏘는 것이 실질적으로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 감정에 오래도록 파뭍혀 있거나 계속해서 그 감정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채찍질 하고 죄책감 느끼도록 하는 행위는 스스로에게 쏘아대는 잔인한 두번째 화살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번째 화살때문에 스스로를 괴롭고 힘들게 한다.


'나를 심판하는 판사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첫번째 화살도 아픕니다. 그런데 정말 아픈것은 두번째 화살입니다.
'두번째 화살은 첫번째 화살에 대한 대응으로 내가 나에게 쏘아대는 화살입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문제를 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이러이러한 환경에서 이러이러한 경험들을 겪었고 그로인해 너무 아픈 트라우마가 생겨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내 오랜 상처이므로 앞으로도 고쳐내기가 힘들거야. 라는 식으로 절망적인 생각들을 많이 생각하는데, 물론 트라우마의 종류가 뭐가 됐던지간에 그걸 이겨낸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않은게 팩트이고 어쩌면은 끝없는 숙제가 될 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좀 더 내가 '능동적'으로 고쳐 나갈 수 있는 한 부분이라는 인식을 하게끔 해주는 문장이 있어서 되게 좋았다. 그것은 바로 트라우마로 인한 방어기재나 반복되는 행동양식들을 그저 '습관'으로 달리 생각해보자는 부분이었는데, 트라우마 라는것은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기 때문에 정신적 질환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그저 '습관'으로 바라보게 되면 '트라우마'라는 거창한 단어에서 느껴지는 부담감이 덜고 내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가벼운 문제 정도로 여길 수 있다는 부분이 나름대로 신선한 관점의 전환이라고 느껴졌다. 우리에게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거창한 단어보다는 '습관을 바꾸기'라는 쉬운 관점으로 이를 다룬다면 훨씬 부담도 덜고 효과적일 수 있지않을까.


'심리의 문제를 습관의 문제로 바라 볼 때 얻게되는 가장 큰 수확은
자신을 능동적인 주체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 입니다.
습관은 내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방송인 타일러라쉬가 쓴 책 "두번째 지구는 없다"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이 책을 알게된 것은 이웃 블로그님이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작성한 것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는데 책 제목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꼭 한번 읽어보고싶다' 라는 구미가 확 당기는 책이었다. 나 자신이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지구 자원을 빌려쓰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써,  언제부턴가 나도 서서히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게 딱 언제부터라고 콕 집어 얘기하자니 사실 특별한 계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나는 평소에도 동물을 굉장히 좋아하고, 기후 문제로 고통 받는 야생동물들을 우연히 보게 되면 안타까워했고,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 재해나 전염병 등등을 뉴스에서 확인할 때 마다 내가 그 직접적인 피해지역에 살고있는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피해로 인한 영향을 언젠가 우리도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지, 그냥 아주 서서히 자연스럽게 환경 문제에 최소한의 양심적 관심을 갖게 된 경우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저자 타일러가 얼마나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사람들에게 피부에 와닿도록 전달하고 싶어했는지를, 그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 갖지 않는 것은 실질적으로 우리 실생활에 크게 문제점이 와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든지 화장실이나 주방에 가서 물을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고 더우면 버튼 하나로 에어컨을 켜면 그만이며, 배고플땐 나가서 돈을 지불 하기만 하면 원하는 음식을 사먹을 수 있고 심지어 한국은 배달문화도 완벽한 상태이니, 실생활에 있어서 환경 문제로 인해서 인간이 생명에 위협을 받고있다는 경각심을 갖기가 어렵다. 물론 요즘이야, 코로나 19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지만 뭐 그마저도 누군가는 '환경'과는 무관한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물론 지금까지도 코로나 19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진실을 숨기고 왈가왈부 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와닿은 많은 글들이 있었는데, 저자 타일러가 강연을 나가거나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환경 문제에 대해 언급할때 마다 "사실 한국은 영토도 너무 작아서 지구에 끼치는 피해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아주 일부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토가 상대적으로 훨씬 큰 중국이나 인도 이런 국가들이 환경 문제에 더 앞장서야 하는 것 아니냐." 라는 식의 답을 종종 들었다면서 그가 제시한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 (Earth Overshoot Day)" 이라는 것인데, 인류가 지구 자원을 사용한 양과 배출한 폐기물 규모가 지구의 생산 능력과 자정 능력을 초과하는 날 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마치 신용카드를 쓸때의 원리처럼 다음 달 받을 소득을 미리 앞당겨 쓰는것과 같이, 지구 자원을 앞당겨 쓴다는 개념인데 한국은 새 해가 접어들고 4월 10일 정도가 되면 이미 우리가 그 해 쓸 수 있는 지구 자원을 다 소모해버린 다는 것이었다. 그럼 나머지 달은 결국 지구에 빚을 지며 자원을 앞당겨 쓰는 셈이고 이 수치는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환경 파괴해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글을 보고, 한국의 땅덩어리가 타국에 비해 작기 때문에 지구에 입히는 환경 피해가 적을 것이다. 라는 논리는 아주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THERE IS NO PLAN B"

 

"우리는 한 해 동안 지구가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의 양보다 훨씬 많이 소비하고 있다. 지구가 줄 수 있는 양이 1이라면 매년 1.75를 사용한다. 그 부족분은 지구로부터 앞당겨 빌리고 있는 셈이다. 슬픈 사실은 지구는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지구가 자원을 더 빌려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살아갈 수가 없다."

 

이상 빌려 쓸 지구가 없다. 라는 말 처럼 경각심을 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는 것 같다. 뭐, 내가 살아갈 동안은 그래도 멀쩡하겠지. 라고 안주할 수 있지만 책에 따르면 지금 이 속도로 환경 오염이 진행 되었을 때, 2050년이 되었을 때는 세계 몇몇 지역이 물에 침수 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으므로 사실 결코 먼 미래 얘기가 아니다. 2050년이라고 해봐야 고작 30년 후, 지금 젊은이들은 슬슬 은퇴를 고려할 나이쯤 되었을 시기인데 요즘 100세 시대라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아직 살 날이 한참 많이 남은, 노년의 첫 시작에 접어드는 나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갈 날 동안은 지구 안망해." 라는 무책임 말을 던진다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라는 거다. 그러면 생태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될까. 라는 부분에 대해 저자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자세히 구체적으로 책을 통해 제시하는데, 일반적으로 분리수거, 일회용 사용 줄이기 등등 사소한 부분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는 환경파괴의 주범이 아니야! 라고 누군가는 자부할 수도 있지만, 이미 빠른 속도로 환경 오염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정도로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어 버린 환경을 단번에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하는 부분에서 뭔가 좀 더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분리수거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재활용 되는 폐기물은 고작 십몇프로대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좀 더 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이는 부분이었다. 

 

 


 

"폭력이 눈앞에 벌어지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방조죄이다. 우리는 우리 땅이 물에 잠기고 숲이 불타며 동식물이 멸종해 결국 우리 숨통을 조이는 현실을 방조하고 있다. 어떡할 줄 몰랐다고 해도 방조한 것이고, 범행을 돕는 줄 몰랐다고 해도 이미 동조한 것이다."

 

"대기업들은 로비를 통해 업체를 띄우고 환경 이슈를 파묻는 일을 계속 해나갔다. 기후위기가 거짓이라는 식의 날조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누군가의 사익을 위해서 우리의 미래가 희생된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은퇴 후 살아갈 땅, 침수 위험 없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땅을 빼앗아 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게 아니다. 고의적인 것이다. 몇몇 기업, 몇몇 국가들이 기후위기 안에서 수익을 창출해놓고 본인들을 위한 유리한 입장을 차린 것이다. 그걸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호구로 살아왔다는 것을."

 


 

책에서 발췌해온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환경보호를 위해서 분리수거를 하거나 외출시 플러그를 뽑는 등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들은 아주 기본적인것에 불과하며 그 보다도 중요한 것은 좀 더 이 세계를 더 큰 영향력으로 쥐락펴락 하는 대기업들이 취하는 행동, 정치인들이 취하는 행동들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기업의 사익을 위해 환경 문제를 외면하는 기업의 제품을 불매 한다던지, 환경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후보자 에게는 투표하지 않는 식으로 환경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바로 육류 소비에 대한 이야기도 굉장히 와닿았는데 축산업이 온실가스 배출 비중이 높다는 것과 그 중에서고 양고기, 소고기가 큰 비중을 차지 한다는 얘기였다. 

 


 

"축산업이 온실가스 배출 비중이 높은 이유는 산림을 없애 농장을 만들고 가축을 키우면서 자연이 가진 탄소흡수원을 없애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기를 조금 덜 먹는 일, 채식 식단을 늘리는 일, 음식을 남기지 않는 실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육식과 채식에 대한 부분은 내가 예전부터 서서히 관심 갖고있는 주제 이기도 한데, 그 전에는 단순히 '동물'의 생명의 존엄성이라던지, 개인적으로 내가 동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특별한 애정의 문제로 관심 갖던 주제였다면 이 책을 읽고나서는 '환경'의 문제와도 근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됨으로써 좀 더 나의 '채식지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좋은 동기부여를 찾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식주의'라는 발언을 조심하는 이유는 나는 여전히 육식을 하는 인간이고 나는 완벽하게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다 라는,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책임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식 지향' 이라는 가치관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강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육고기를 덜 먹는 식단이 내게도, 앞으로의 인류와 자연에게도 이로운 선택이라면은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쨌든 나의 블로그에도 명시해놓은 모토이기도 하지만 '건강'과 더불어 '생산적인 삶의 질 추구'를 고민하는 평범한 블로거로써 내게는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중요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마침 오늘 저녁 식단도 간단한 샐러드로 끼니를 채운 나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을 하며, 나름대로 내 개인의 삶의 질 추구와 평범한 소시민으로써 환경 문제에 작게나마 최소한의 관심을 갖고 그 문제 해결에 가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에게 칭찬과 더불어 좀 더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싶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우리 존재, 우리가 만든 모든 문명은 자연 안에 있기에 질병은 반드시 인류의 파멸로 돌아온다. 자연은 '공존'을 말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살펴야 할 우리의 보금자리이다." - 본문중에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국내도서
저자 : 류시화
출판 : 도서출판더숲 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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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 '한줄도 너무 길다.' 이후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류시화님의 책이다. 어린시절에 류시화님의 인도 여행기를 읽고 한때 나도 인도에 대해 환상을 가득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이 책에서도 류시화님은 인도 사상과 철학, 그리고 오랜 인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많은 얘깃거리들을 흥미롭게 소개해주고 있는데, 나는 인도의 잔인한 현실을 알게된 후 부터 인도에 대한 환상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고유 문화와 명상, 철학, 깨달음 등등 많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엿볼수 있었다. 류시화님의 오랜 여행 경험과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엮은 그의 에세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쩌다보니 내가 이 책을 두번, 세번에 걸쳐 나눠읽게 되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는 속도감 있게 책 전체를 빠르게 훑어 읽었고 두번째 , 세번째 읽을때는 한 챕터 한 챕터 짧은 이야기들을  곱씹으면서 아주 천천히 읽게 되었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전에 또 한번 책을 음미하며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신념과 정의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딪힐 때 그럴 때도 이 책에서 류시화님이 전하는 주옥같은 얘기들을 다시금 꺼내어 회상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들게끔 하는 그런 책. 그 만큼 이 책에서 류시화님이 전하는 얘기들은 삶 전체를 아우르는 깊은 통찰력을 제시하면서 우리 삶의 지침서가 되어줄만한 '삶의 철학'들에 대한 많은 얘기들을 전달 해준다. 그런 점에서 언제고 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마다 다시금 펼쳐 읽으면서 맘속에 되새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숫자에 포함시킬수 없는 사람 _ 나와 너>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라고 썼다.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이다."

 

 

인간이 맺는 관계의 두 종류 나-너, 나-그것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고 싶은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나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맘속에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고 그것에 대해 정의 내리고 어디까지가 얼마나 진심의 관계인지를 마치 늘 점검하는 것 같다. 특히나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오히려 고독함, 외로움 따위의 감정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중요한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소통하느냐 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고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을 그릇 하나가 없다면 결국 군중속에서도 나홀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거다.

 

나-너, 나-그것.

 

'나-너'가 순수한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진짜 관계라면 '나-그것'은 존재의 가치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기능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것이라고 했다. 즉 얼마든지 내가 아니어도 비슷한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그런 흔한 자리. 그게 '나-그것'의 관계다. 공적인 상황에서 맺어지는 나-그것의 관계는 어쩔수 없이 당연한 것이지만 내게 소중한 사람, 내 연인, 가족, 친구들까지 나-그것의 관점으로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 얼마나 외롭고 공허한 일일까. 그럼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수시로 '나-그것'의 잣대로 평가하고 매기는데에 익숙해져 간다. 스스로 고독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너무 외롭다고들 호소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쌍방으로 이루어지는 '나-그것'의 관계는 상상만해도 공기가 얼음장 같이 차갑다. 아니, 그저 공허하기만 하다. 마치 서로 완벽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다른 예로, 내가 상대방을 '나-너'의 존재로 대했으나 상대방은 나를 '나-그것'으로써 대해왔다는것을 알았을 때 그 때 느끼는 상처와 상실감도 우리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남겨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또 상대방에게 주기도 한다. 관계는 상황에 따라 '나-너'로 정의 할 때가 있고 '나-그것'이어야할 때를 구분지어야 하지만 내가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건 '나-너'로 유지되어야 하는 깊숙하고도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 역시도 '나-너' , '나-그것' 이 두가지 사이에서 미친듯이 혼란을 겪으며 왔다갔다 하는 사람, 아예 둘 중 하나에만 꽂혀 거기에 모든 의미를 다 쏟아붓는 사람 등등 여러가지들을 보았고 경험했다. '나-너'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주 이상적이면서 따뜻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그것'의 관계에 모든걸 쏟아붓는 사람을 상상하면 마치 허울 좋은 껍데기들을 열심히 쓸어모아 담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외로움을 끊지 못한다. 당연히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그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만큼이나 안타까운 건, '나-너'와 '나-그것'의 관계 사이에서 줏대없이 왔다갔다 자기 자신을 계속 시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있노라면 나 마저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횡설수설하며 하는 말마다 일관되지 못하고 관계에 대한 평가도 언제나 늘 극단적이고 심지어 수시로 바뀌기까지 한다. 어떤날은 나를 최고로 칭찬해주지만 어떤날은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평가매기는 것 처럼. 그것은 나를 보는 평가 기준을 '나-너'로 보았다가 다시 어느날은 '나-그것'으로 보았다가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수시로 관점을 달리하여 계속 평가 매긴다면 그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일까. 그렇게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는 종잇장 같은 관계를 가면을 쓰고 유지해 나간다는게 얼마나 큰 에너지 소모이며 낭비인지. 결국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되어 스스로에게 비수 꽂는 일이 될거라는 걸,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내가 자초한 일이란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나-너, 나-그것의 관계에 대해 읽으면서 너무 많은 슬픈 인연과 이별과 관계들이 떠올랐다. 내가 진심이더라도 상대방은 내게 그렇지 않은 관계들은 살아가면서 언제가 또 다시 겪을 수 있도 있다. 아마 내 마음대로 그것들을 미리 알아차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느날 그 실체를 깨달았을 때 혹시라도 그동안 내가 쌓아온 '나-너'라는 순수한 마음이 너무 아깝고 가슴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 관계를 끊어내지 못해선 안될 것이다. 냉정하게 그들을 끊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살면서 계속 수많은 관계를 맺고 이별을 겪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를 '나-그것'의 관계로써 대하며 상처를 준 사람들을 끊어내는 일에 계속 맘 아파 해선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런 이별에 담담해지고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참다운 관계를 만들고 유지해나가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닭이 몇 마리인가_생명들에 값하는 삶>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닭과 소와 돼지를 먹는가? 매일 얼마나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그 목숨에 값하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 들여다 보는 것만큼 중요한 명상은 없다."

 

 

마치 이 글을 쓰면 내가 당장이라도 채식주의를 선언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나로써는 종종 육식을 하는 것,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고찰에 불현듯 빠지곤 하는데 그럴때 마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가치관에 따른 자유 선택이라는 결론을 늘 내린다. 그치만 또 다시 '정말 채식이라도 해야되는걸까'라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는데 바로 유튜브로 야생동물 구조 관련 컨텐츠를 보거나 아니면 반려동물로써 강아지, 고양이가 아닌 오리, 돼지와 같은 동물을 키우는 유튜버 영상을 볼 때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뿐,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언제나 '고기는 사랑입니다.'와 같은 얘길 하게 된다는게 꽤나 나 자신이 이중적이게 느껴지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야생동물 영상같은걸 보면서 공감이나 하지나 말던가)

 

 

그런 와중에 닭이 몇 마리인가. 라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읽게 되었는데 통합의학 선구자라는 의사 레이첼 나오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든여덟살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겪은 이야기다.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아침마다 15분씩 함께 명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레이첼도 옆에 앉아 명상을 함께 했다. 그러고 한참 후 눈을 뜬 어머니가 레이첼을 바라보자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닭을 세고 있었지." 라고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명상을 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실망하고 당황한 레이첼에게 어머니가 이렇게 다시 말한다. 저녁 식사 때 닭고기를 먹고나서, 불현듯 평생 동안 매주 한번이나 두번은 닭고기를 먹었다는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머리로 계산하기 시작했고 두마리의 닭을 52주에 84년을 곱하니 8천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그 많은 동물들의 희생의 가치가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때때로 남에게 아픔을 준 적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적은 없으며, 누군가에게 거짓말이나 비난을 한 적도 없음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생은 그 닭들의 희생 만큼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어머니는 대답했다고 한다.

 

 

"매일 얼마나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우리와 똑같이 살아 있기를 원하고 행복을 갈망하는 생명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삶을 잘 사는 것 만이 그 생명들에게 값하는 길이다."

"그들이 어느날 꿈속에서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자신들의 수많은 희생에 값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채식과 육식에 대한 생각과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해 조금 도움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채식을 선택하든 육식을 선택하든 가치관에 따라 판단 할 일이며 뭘 선택해도 틀린건 없지만, 채식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순수한 생명들의 희생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인간으로써 그 희생에 헛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채식주의를 한다는게 그냥 풀만 뜯어먹는 간단한 일인것 같지만 영양소 불균형을 맞춰줘야 되기 때문에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 매우 힘들고 까다롭다. 그리고 알다시피 인스턴트나 가공식품에 육류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거의 없고 라면스프만 해도 이미 육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가난한 사람이 채식주의를 하겠다는 것은 굶어 죽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경우엔 오히려 채식을 하거나  healthy food를 지향하는 경우 대부분 상류층인 경우가 많고 그 외 서민들은 맥도날드에서 저렴한 값의 햄버거를 사먹거나 하는것이 일상인 것이다. 우리도 편의점에서 간단한 컵라면 한끼 떼우는게 가장 저렴한 한끼 식사이듯이 말이다.

 

 

어쨌든 채식을 한다는것은 정말 만만치 않는 부분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더욱 '회식'문화를 생각해보면 나 홀로 '채식주의'를 선언하면서 매번 고깃집 회식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 지인, 친구들과 만날때도 식당을 찾을 때 마다 채식 레스토랑 찾아야 하거나 혹은 일반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주문하면서도 '육류'를 빼줄것을 당부하는 것 등등. 채식주의가 한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이렇듯 막대한 수준인데 희생되는 동물들이 그저 '불쌍해서, 가엾어서.' 라는 공감대 만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더욱이 채식주의 생활은 불가능 하다고 본다. (산속에서 자급자족을 하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순간의 감정으로 책임지지도 못 할 '우발적인' 채식주의 선언을 한다거나 채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과한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동물을 사랑하지만 육식주의자 라는게 외람되고 이상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의 희생의 값어치 만큼 나는 가치 있는 삶을 나는 살고있는가"를 질문 한다는것이, 채식과 육식을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많은 생명체들의 희생을 존중함에 있어서 충분한 명상의 가치가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다면, 건강을 해칠 수준으로 과도하게 육식을 섭취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도 커진다. 채식주의자가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 건강을 해칠 수준의 불필요한 육류 섭취는 피할 수 있는 것. 바로 '채식지향'이 어느정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외에도, 책의 제목처럼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 '두번째 화살' 등등 마음속에 깊이 와닿는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배울 수 있는 책이었고 내 삶에서 명상의 시간이 필요할 때, 고독의 시간이 필요 할 때, 또 다시 내가 방향성을 잃었다고 생각 될 때마다 이 책을 집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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