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2+2=5"



지금 이 책을 읽기에 굉장히 시기 적절한 타이밍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전체주의 사회가 어떤 구조적인 형상을 띄고 있고 그런 체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어떤 권력의 지배하에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등등 자세한 내용을 알고싶다면 당장 이 책을 읽어보라 권유하고싶다. 물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써는 이 책을 읽고 마치 나와는관련 없는 얘기 처럼 저런 세상이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다 혹은 저런 체제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라는식의 연민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민주주의 사회가 절대 다시 공산주의 사회로 변모될 가능성은 추호도 없다 라고 확신을 가지기에는 여전히 불온전한 세상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현재 누리는 자유나 개인의 사유재산 같은 것들도 모조리 박탈 당하고 통제된 세상속에서 살아갈 그런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마 너무 과민반응 하는거 아니야? 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책 속에 존재하는 '빅브라더'의 존재가 꼭 전체주의 사회에만 존재 하는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순 없을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속에서는 더욱 더 교묘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제 하지 않는 듯, 통제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있고 그 대표적인것이 바로 sns와 미디어,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 소설속에나 존재 할 것 같은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현실과 빼다 닮은 모습들이 너무나 많이 포착 된다는 부분이 내겐 공포스러웠다.

지금도 지구 건너편 어느 나라에서는 전쟁을 하고, 또 어떤 나라는 한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면서 그 나라를 점유 해버리려 하며 이 모든게 현재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임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인지할 수 있지않나. 그들의 권력 다툼이자 사실상 전쟁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한 나라가 독립적인 힘을 잃게 되는 순간 보이지 않게 스며드는 권력의 침공으로부터 우리가 언제까지 안전하게 지금처럼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 책속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살아가는 세상도 바로 흔한 사회주의 세상의 모습인데 그들의 체제를 유지 시키기 위해서 즉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사람들을 매일 세뇌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와 다양한 사상, 가치관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기존의 사용하던 단어들을 폐기시켜 버리는 둥 체제 유지를 위해 매일 같이 조작과 날조가 빈번히 일어나는 세상이다. 단어 사용을 통제하고 억압한다는 내용은 내가 이전에 봤던 영화 "The giver"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부분인데 과연 언어가 바뀌면 사고도 함께 바뀌는 것일까? 라는 의문에 대해서 나는 어느정도 '그럴것이다' 라고 동감하는 편이다. 예를들어 '노랗다' 라는 한국어 표현은 굉장히 많다. '노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샛노랗다' 등등 전부 다 노랗다는 뜻이지만 각 단어가 갖고 있는 느낌과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저 단어가 갖고 있는 성격에 대해 외국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럼 (그들은 단순히 yellow, dark yellow, bright yellow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단어 사용을 통제한다는 것은 곧 사고를 함께 통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낱말을 없애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지. 물론 없애 버려야 할 낱말은 동사와 형용사에 많지만, 명사에도 수백 개나 있네. 그리고 없애야 할 말은 비슷한 말뿐만 아니라 반대말도 있지. 도대체 한 낱말이 단순히 다른 낱말의 반대만을 뜻한다면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뭐 있겠나? 한 낱말 안에는 이미 그 자체 내에 반대로 말할 수 있는 요소가 포함돼 있네. ‘좋다(good)’라는 낱말을 예로 든다면, 그 반대말을 ‘안 좋다(ungood)’라고 하면 되지. 철자도 생판 다른 ‘나쁘다(bad)’는 말이 뭣 때문에 따로 필요하겠나?‘안 좋다(ungood)’란 말이면 충분하네. 모양은 비슷하지만 오히려 이게 다른 말보다 더 정확한 반대말이지. ‘좋다’는 말의 뜻을 더욱 강조하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네. ‘탁월하다(excellent)’느니, ‘훌륭하다(splendid)’는 따위의 말이 수두룩하게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좋다(plusgood)’라는 말이면 충분하고, 이걸 더욱 강조하고 싶으면 ‘더욱 더 좋다(doubleplusgood)’라고 하면 될 것이네. 물론 이런 형태의 낱말들이 이미 사용되고는 있지만, 신어(新語)사전의 결정판에는 ‘좋다’란 말 한마디만 남을 걸세. 그러니까 좋고 나쁘다는 개념은 여섯 개의 낱말로 나누어지지만, 실제로는 단 한 낱말로도 충분하다는 얘기지. 어때, 멋있지 않나. 윈스턴? 물론 이건 애당초 B.B.(빅 브라더)의 아이디어였다네.” -조지 오웰 <1984>에서 발췌

 




https://fancysailor.tistory.com/288?category=797069

 

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 The giver > 미래 사회주의 세상을 구현한 SF 영화

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 The giver > 미래 사회주의 세상을 구현한 SF 영화 더 기버 : 기억전달자 The Giver , 2014 제작 요약미국 | 드라마 외 | 2014.08.20 개봉 | 12세이상 관람가 | 9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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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그 나라의 실세들 즉 권력에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부류인 내부 당원들의 바로 아래, 외부당원으로써 등장하는데 체제 유지를 위해 각 부서마다 그들에게 주어진 업무가 존재한다. 주인공이 맡은 업무가 바로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데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일들이었는데 주로 과거의 기사들을 소각하고 단어들을 폐기시키며 과거의 진실된 역사를 상기시키는 자료들을 모조리 없애는 역할들이다. 주인공은 본인이 하고 있는 일과 스스로 어렴풋이 기억하는 과거의 세상 사이에서 큰 혼란을 느끼고 진실을 날조하고 폐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당에 서서히 반감을 느끼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권력은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가 있지. 복종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괴롭히지 않고 어떻게 권력자의 의사에 복종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주는 가운데 존재하는 걸세. 그리고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권력자가 원하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뜯어 맞추는 거라네."




포스팅 맨 앞머리에 "2+2=5" 라는 글을 썼다. 이게 바로 주인공 윈스턴이 사는 세상에서 말하는 세뇌와 통제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수식이 아닐까. 즉 책 속에는 '이중사고'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진실의 여부와 관계 없이 당에서 주장하고 말하는 것이 곧 진리이며 설사 그것이 틀렸다 할지라도 진실이라고 믿어야하는 것이 바로 이중사고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당이 맞다고 주장한다면 반박의 의지 없이 그저 맞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고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인간의 자주적인 생각과 주체성을 파괴시키고 나면 당을 위한 완벽한 노예로 재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 주체성과 자발성을 잃은 인간, 즉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빼앗긴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이미 빛을 잃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이 정말로 뼛속 깊히 디스토피아적 문학이다 라고 말할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책의 결말이 더욱 그 정점을 찍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의 중반부쯤 들어서 윈스턴은 쥴리아라는 여성을 알게되는데 사랑이나 섹스처럼 쾌락적인 감정과 오르가즘 마저 금기시 되어있는 그 사회에서 둘은 철처히 비밀리에 연애를 하게된다.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대화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당이 세상을 억압한다고 한들) 사람의 마음 깊은 곳 까지 통제할 수 없는 법이라고. 깊은 마음속의 생각마저 그들이 빼앗아 갈 순 없다 라는 말을 하고 쥴리아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 역시도 윈스턴의 말에 백번 동의하는 입장이었지만 책의 결말에 다다르면서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던 그가 마음 속 깊은 생각마저 당에게 세뇌를 허락하고 (세뇌 당한것이 아니라 세뇌를 허락한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결국 고통스러운 고문에 못이겨 굴복하게 됨으로써 충격적인 한 문장으로 끝 마무리 지어지는 이 소설이 내게는 뭐랄까 정말로 큰 허무함을 안겨다줬다. 앞에 첨부했던 영화 The Giver 역시 똑같은 전체주의 사상에 대해 그렸지만 그래도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결말로 마무리가 지어졌다면 이 소설은 정말로 디스토피아의 끝을 보여준다.




아래는 1984를 쓴 조지오웰이 결핵으로 죽기 전 남긴 마지막 경고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이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그가 남긴 한마디가 매우 임팩트 있게 다가온다.

"Don't let it happen, it depends on you"



https://www.youtube.com/watch?v=S83Fz3i409A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19/01_1.html

[동아신춘문예]

오즈  - 성해나 그 여름, 나는 구에서 주관하는 주거 사업의 세입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독거노인의 남는 방을 청년들에게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세주는 하우스 쉐어링 사업이었다. 입��

www.donga.com

 

 

"때로는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타인과의 유대감"

 

 

나는 가끔씩 동아신춘문예 사이트에 접속해서 수상작들을 읽어보는 취미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제 막 새로 발굴된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뭔가 더 신선한 느낌에 자극을 받기도 하고 그 열정/패기가 서려있는 작품들을 모니터로 간접적으로 경험하는것이 내겐 꽤  흥미롭고 즐거운가보다. 뭔가 어디에도 없는 순수함의 날것, 결정체들을 뭐든 읽고 접하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차오를 때 넌지시 이곳에 들어와보게 된다. 어쨌든 내가 읽어본 작품은 2019년 중편소설 당선작 '오즈'라는 작품이었다.

 

어딘가 사연이 짙어 보이는 젊은 여자 주인공 '하라'가 등장하고 그 주인공이 독거노인 할머니인 '오즈'씨와 함께 살아가게 되면서 겪게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남기고 떠난 빚더미 때문에 살곳이 애매해진 주인공은 구청에서 주관하는 주거사업의 세입자로 참여하게 된다. 독거노인들의 남는 방을 청년들에게 저렴한 시세로 내주는 식인데 그곳에서 아주 깐깐하고 평소 사람과 거의 왕래하지도, 쉽사리 말을 섞지도 않는 걸로 유명했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런 할머니가 유일하게 외출을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오즈의 마법사'가 극장에 걸릴 때 이다. 그때마다 늘 극장을 찾아온다고 해서 '오즈'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타인과 가족보다 끈끈한 유대관계를 그렸던 몇몇 영화가 생각이 났다. 바로 영화 '가족의 탄생'이 그러했고 '죽여주는 여자'와 같은 작품이 내게는 그랬다. 이 작품 역시도 철저히 서로 '이익관계'로 엮여 만나게 된 두 인물이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보다 서로의 상처를 묵묵히 이해하고 보듬는, 진한 우정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옛날에 어디서 들은 말인데 가족도 '남'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냉혈한 같은 소린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말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는 사람으로써 살면서 종종 피 섞인 가족들이 어쩌면 타인보다 못한 경우들을 흔히 보고 듣고 경험했다. 예전에 내 지인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기도 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가족은 똥구멍 같은거다, 드러워도 절대 못떼내. 그냥 그게 가족이다."

 

 

너무나 명쾌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족관계가 오히려 더 곤욕스러울 때도 있다. 만날때마다 트러블이 잦거나 나와 잘 맞지 않는 타인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자주 안 만나면 되고, 연락하지 않으면 끝나는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떼내어 버릴수도, 쉽사리 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어쨌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타인인 두 사람이 '가족'보다 더 깊은 이해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게 되는 관계를 보면서 과연 진짜 가족의 의미가 어떤건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의 낯선 것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방식들이, 어쩌면 서로가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늘 실수 연발하고 쉽게 상처를 주게되는 피 섞인 '가족'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건강하고 애틋한 정서적 교류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하라'와 오즈 할머니는 각자 개인만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실 '상처', '트라우마'와 같은 단어들은 영화나 문학에 수시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작품이든 이야기 속엔 갈등을 빚는 구조가 있고 그 갈등은 상처나 트라우마로 부터 시작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캐릭터를 깊게 이해함에 있어서 '상처'는 중요한 단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려 심각한 애정결핍을 겪어온 '하라'와 일본군 혹은 일본인으로부터 학대를 당한것으로 추정되는 '오즈' 할머니. 거기다 할머니는 인공 심장 박동기 삽입술을 받은 병력이 있다. 그 둘은 '타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하고자 한다. 할머니는 일본어로 쿠소(똥,대변)라고 몸에 새겨진 문신이 있었다. 그 흉측한 문신을 가리기 위해 마침 취미로 몸에 타투 새기는 작업을 공부하고 있던 '하라'에게 자기 몸에도 예쁜 커버업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한참 모자란 실력이지만 '하라'는 평소 생화 꽃을 압축하여 수집하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예쁜 꽃을 새겨드리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딱딱하고 소통이 없었던 둘 사이의 허물이 조금씩 벗겨지고 괜히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는 모습이 무심한듯 하지만 '츤데레'같은 모습이 비춰져 애틋해 보였다.

 

사실 소설 속 하라의 과거 기억 회상 중, 남동생의 죽음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그녀의 가해 여부가 확실치 않고 희미했다. 그러나 예상해보건데 '하라'가 형사로부터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던 경험과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봤을 때 여주인공 '하라'가 남동생의 죽음에 직접적인  가해자 일수도 있다는 소름끼치는 가능성을 어느정도 열어두고 있다고 본다. 아마도 그 죄책감과 본인에 대한 혐오로 허벅지에 수 차례 자해를 시도 해왔지 않았을까. 그래서 '합리적'으로 자해 할 수 있는,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타투'라는 것을 자연스레 시작해보게 되었다는 그녀의 얘기가 어느정도 그 무서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어찌됐든, 생판 남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가족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고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감정들을 공유하면서 담담하게 풀어가는 이야기가 조용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오즈'라는 할머니 캐릭터가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진한 이미지에 어딘가 강해보이는 인상. 눈빛은 쉽게 사람들에게 정을 내줄 것 같지 않은 차가운 느낌에 여름에도 터틀넥 옷으로 몸을 가리고 다니며  꽤나 야위고 마른 몸의 할머니가 캐릭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할머니가 애착하는 영화로 '오즈의 마법사'가 나온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뭔가 신비로운 환상의 마법 세계를 그리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오즈'라는 별명을 가진 할머니. 극장 개관 이래로 줄 곧 오즈의 마법사를 보러 빠짐없이 찾아간 할머니가 이 영화를 본 횟수만 해도 수십, 수백번이 넘을텐데 불구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스크린을 응시하며 집중하던 할머니에게 '오즈의 마법사'라는 영화는 어떤 의미였던걸까.

 

 

 

 

 

 

 

작가 박상

출판 작가정신

발매 2014.05.3.0

 


 

 

박상 이라는 작가를 너무 우연히 알게된게, 네이버에 먹는 '박상'을 검색했는데 왠 작가가 검색되더니 뭔가 범상치 않아보이는 외모를 가진 작가에 호기심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그의 프로필에 기재된 블로그를 클릭해서 들어갔다.

구경하다보니 그가 신춘문예로 데뷔한 기타 치는 소설가 라는걸 알게되고 그의 작품이 뭐가 있나 살펴보다가

읽어보고 싶은 책이 생겨 읽어봤던 기억이난다. 

그럼 본격적인 책의 리뷰를 아래에 시작.

 


 

 

병신같지만 멋있는 그 신광택

 

주인공 신광택은 모든 병맛스러운 상황들을 그 특유의 '스뽀오츠' 정신으로 희화화 하는 재주를 타고 난 인물이다.

내가 느낀바로 그의 재주는 거의 모든 세상의 더러움, 치사함, 우울함, 찌질함 같은 것들을 코믹 장르로 바꿔 버릴 정도의

경지에 이른 '선수'다.

아마 그정도 스킬이라면 우울하기 짝이없는 이 세상도 그의 '스뽀오츠' 에너지로 견딜만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거 왠 정신나간 미친놈이 세상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못해 결국 스뽀오츠를 외쳐대는 궁극의 불쌍한 또라이 소릴 하는거야"

라는 생각 마저 든다. 그런 나는 아직 선수가 되지 못했나 보다.

그렇지만 신광택이 빠른 속도로 취하고 다시 빠른 속도로 술에 깨어나는 것 처럼 나는 빠른 속도로 우울함에 빠지고 또 다시 빠른 속도로

즐거움을 되찾는 감정기복의 선수라면 선수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주인공에게 느낀 동질감이라면 아마 그런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조'의 모드와 매우 유사한 점, 그러나 나에게는 다시 빠른속도로 '울'이 되는 장기가 숨어있으므로 

신광택과 나는 완전히 대칭하는 쌍쌍바 느낌은 비록 아니지만 모든것들을 코믹화 하는 그의 재주는 언젠가 내가 궁지에 몰렸을때

꽤나 사용해보고 싶은, 탐나는 정신병적 스킬임에는 틀림없다. 정.신.병.적.

나도 여기서 왜 굳이 '정신병적' 이라는 표현을 덧붙여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스스로도 말했듯이,

아마도 그 '쁭쁭쁭쁭' 소리가 나는 경지는 제정신과 정신나감의 중간 그 언저리쯤 도달했을 때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문득 예전에 내가봤던 영화가 떠올랐는데 도저히 머릿속 데이터를 아무리 뒤적거려봐도 영화 제목이 기억이 안난다.

(영화 제목은 factotum. '삶의 가장자리' 라는 영화이다. 그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확히 생각난다.)

 

이 책은 선수 생활백서이자 동시에 신광택의 취업알선 전기 시트콤 같은 느낌인데 예전에 언젠가 우연히 봤던 영화(factutom)에서 

마치 신광택스러운 삶을 사는 또 다른 남자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다른점이 있다면 신광택은 매우 병맛스러움, 코믹스러움인데 반해 그 영화 속 주인공은 신광택과 별다를바 없는 처지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남성적이며 마초적인 남자였다는 점. 심지어 섹시하기까지 하다. 신광택의 장기가 코믹이라면 그 인물의 장기는

섹시와 퇴폐미. 어쨌든 굳이 이런 설명으로 신광택이란 인물을 쭈구리같이 만들 생각은 없었으나 아무쪼록 내가 말하고싶은 부분은

바로 그거다.

 

어쩌면 코믹이 우울함과 진지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게 아닐까?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하고 싶은 걸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 중요하고도 무게 있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인생은 절대로 우울하거나 과도하게 심각해지지 않는다.

심각하게 진지하고 우울함에 빠진 사람. 궤도를 이탈한 상태, 혹은 그런 범주에 있는 위태로운 사람이 준수한 외모를 가진 인물일때

우리는 우습게도 역설적으로 그것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미의 가치를 느낀다. 일명 퇴폐미라는 것. 

factotum 이라는 영화속 남자가 그랬듯. 

(어쨌든 영화속 남자는 섹시함으로써는 선수였는지 모른다.)

근데 정작 이 코믹이라는것은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완전히 또 다른 세계가 되며 에너지의 원천이 확연히 다른 그 무엇인것 같다.

자칫 쓸데없는 외모지상주의적 내용이 될뻔했지만 어쨌든 그 병맛스러움이 매우 인간적이다 못해 에너지틱 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병맛이라면 언제든지 나도 "쁭쁭쁭쁭" 진동을 느끼며 아름다운 선수가 되기를 희망 하고 싶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조'와 '울'을 동시에 지닌 선수라, 언제 또 다시 우울함의 굴레로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지만 

다시금 '조'의 모드일때 신광택 스러운 골때리는 낙천주의로 에너지를 뿜뿜 하기를..... 

 

 

 

예테보리 쌍쌍바
국내도서
저자 : 박상
출판 : 작가정신 201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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