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용서' 라는 키워드에 조금 꽂혀있다. 나는 종교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종교에서도 그렇고 심리학자들도 그렇고 모두가 하나같이 '원수를 용서하라' 라는 똑같은 말을 내뱉는다. 사실 굉장히 익숙하지만 어찌 하나같이 저런 답답한 소릴 하는걸까 그냥 호구가 되라는 소리 아닌가. 라고 의아한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 이 말이 전달하는 의미와 깊이를 몸소 느끼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온전히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냥 흔히 말하는 '져주는게 이기는거다' 같은, 그런 소리 아니야? 즉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라. 따위의 의미로써 주로 해석했었는데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말 역시도 맞는 말이지만 '카르마'에서 설명하는 이 문장은 좀 더 추가적인 다른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카르마가 발생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줄 때. 쉽게 말해서 의도적인 어떤 나쁜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심적으로 고통을 주거나 관계 안에서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 피드백이 발생 했을 때 '카르마'가 발생한다 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카르마는 언젠가 돌고 돌아서 내가 행한 나쁜 행동의 결과가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용서'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누군가 내게 몹씁짓을 했다고 치자. 그로인해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고통에 신음했다. 여기서 나의 행동은 두갈레로 나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스스로 위로하고 다시 나 자신을 다 잡고 일어서는데 초점을 맞추는 사람, 또는 나에게 그런 상처를 준 사람을 끊임없이 증오하고 미워하며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며 칼날을 가는 사람. 누가봐도 전자의 경우가 건전하고 건강한 행동이라고 느끼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피해를 준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다. 물론 그 시간 역시도 어쩌면 필요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단, 짧은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분노를 느끼는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 마음을 질질 끌고 오랜시간 동안 나를 더욱 더 고통에 빠지게 하느냐 혹은 빨리 그 고통에서 빠져나와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카르마'에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은, 그 원수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그 감정을 오래도록 내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카르마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내가 상대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기 위해서 나 역시 똑같은 행동으로,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 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도 어느정도 정당하긴 하지만 정도에 따라서 이 말이 적용이 되기도하며 때로는 부적절하기도 하다. 

 

 

어느 누군가 내게 악심을 품고 피해를 줬을 때, 나 역시 똑같은 행위로 되갚아 준다면 나 역시도 나쁜 짓을 행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이 받을 카르마는 나도 똑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내게도 카르마가 발생하게 되버린다. 즉 가장 통쾌한 복수는 그냥 나 자신이 더 건강하고 발전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거다. 즉 죄 값을 받는 사람은 굳이 내가 나서서 똑같은 복수를 행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고 나는 멀리 저만치서 그 사람이 자멸하는, 혹은 파멸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아, 물론 망해라, 자멸해라 라는 식의 앙심을 내 맘속에 품고 있는 것 역시도 카르마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내 할일에 집중하고 내 삶을 열심히 사는 것,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간다는 원리 아닐까. 처음에는 나 역시도 이런 설명이 굉장히 종교적인 해석처럼 다가왔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보니, 놀랍게도 과학적으로 이런 일들이 원리원칙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내가 타고 태어난 환경, 내가 결정 지을 수 없는 운명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카르마'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즉 내가 어떤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랄것이며 어떤 경험들을 하고 나중에 어떤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등등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꽤 많은 옵션들을 미리 결정하고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가 바로 '카르마'이며, 내가 전생에 해소 하지 못했던, 혹은 그 전생에 지었던 죄나 업보 등등의 카르마를 해결 하기 위해서 그 카르마와 연관된 인물과 이번 생에 어떠한 또 다른 밀접한 관계로써 다시 연을 맺게 된다 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서부터 꽤나 불교 정서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아예 전생이라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허무맹랑하거나 근거없는 실망스러운 내용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느정도 호기심을 갖고있고 아예 불신하지는 않는 사람으로써, 그리고 결국 '카르마'라는 단어의 근원 자체를 찾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영적인 영역과 밀접하게 연관지어 지므로,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든것이, 모든 굵직한 운명들이 카르마에 의해 이미 결정된 채로 태어난다면 카르마 라는 것은 결국 '결정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책에서는 결정론 보다는 인과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운명이 결정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의 삶을 개척할 수 없다. 라고 말할 순 없다. 애초에 '카르마'를 해소한다는 거는, 내게 주어진 운명과 인연, 관계들 속에서 더 이상의 카르마를 발생시키지 않고 소멸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현상이 카르마의 해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더 나은 건강한 삶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건에는 이유와 원인이 있고 그것을 단순 결정론으로 단정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 의지와 상관 없는 불행에 대한 것도 '카르마'에 의한 것인가요?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예를들면 전쟁이나, 사고, 자연재해 등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공업에 의한 '카르마'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에 비해 많은 자연재해들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류가  피해 입는 것 역시도,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많은 피해들이 예를들면 환경파괴 같은 것들이 카르마로 발생하여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는데, 어찌보면 내 개인이 직접적으로 저지른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써 내가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카르마가 있기에 모두가 함께 그 카르마의 영향을 받는다. 라는 독특한 개념의 이야기였다. 

 

 

예를들어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도 해당되지 않을까.  누군가 산을 깎아 무리하게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높은 고층 아파트를 짓도록 하였을 때 이 경우에 직접적으로 나쁜 짓을 행한 사람은 아마 그 산을 깎아서 아파트를 짓자. 라는 결정적 역할을 한 국회의원일 것이고, 그리고 그 아파트를 지은 인부들은 시킨 대로 한 결과지만 어쨌거나 산을 파괴하고 아파트를 짓는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는 입주민들 역시도, 직접적인 업을 행하진 않았지만 그 곳에 거주함으로써 환경 파괴에 간접적으로 행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나쁜 기업의 제품을 잘 모르고 소비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예를들어 가학적인 동물 실험으로 제품을 생산해내는 화장품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역시도 간접적으로 동물 학대에 동조하는 것이 되 버린 것 처럼) 그리고 또 이런것과도 연관지을 수 있는 부분일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나 조상이 세상에 많은 죄와 업보를 저질렀을 때 그 자손에게까지 악영향이 가는 것도, 사실 그 자손은 본인이 직접적으로 잘못한 뭔가가 있지는 않지만 그 윗세대의 '카르마'가 너무 강력하여 자손에게 까지 그 책임이 떠안겨 가는 현상과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즉 직접적으로 내가 가담한 '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카르마의 영향을 받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모두가 타고난, 부여받은 환경과 운명은 제 각각 다르지만 그것이 인과관계에 의한, '카르마'와 연관지어 설명 할 수 있다는 부분은 꽤나 흥미로운 얘기거리인 것 같다. 뭔가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어야 될 부분 역시도 없지않아 존재하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라면 사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생의 출발점과 난이도가 제 각각 다른 것은 각자가 타고난 운명인 것을 뭐 어떻게 하겠는가? 중요한것은, 그렇게 부여 받은 카르마를 내가 이 생에서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소하며 살아가는가. 어쩌면은 인생이란게 넓은 의미로 보았을 때 카르마의 해소에 삶의 목적이 있는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마저 문득 들었다. 그만큼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생에서 해소해야만 하는, 이겨내야만하는 카르마는 무엇이며 그 카르마의 영향력이 크면 클 수록 힘들고 험난한 과정이겠지만 그게 우리가 해결하고 풀어야 할 숙제라면 기꺼이 해야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고 나를 성숙하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SIGNS OF LOSS'

상실의 징후들

 


 

 

뮤지엄원 지난번 전시 '치유의 기술'에 이어 이번에는 '상실의 징후들'이라는 타이틀이다. 마치 뭔가 사라져가는,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예언된 경고나 으름장처럼 느껴진다. 본격 AI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혜택과 변화를 하나 둘 얻기 시작했고 최근 큰 반향을 일으켰던 CHAT GPT라던지, 그 외에도 '메타버스' 혹은 'VR'과 같은 것들이 최근 몇년간 기술발전을 상징하는 주요 키워드들이 아니었다 싶다. 하지만 그런 미래의 기술들이 점점 일상생활 깊숙히 들어오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얻는것이 있을 때 동시에 또 잃기 마련이다. 이 전시는 우리가 과학기술을 통해 얻은 새로운 변화에 대해 시사하면서 또한,  그 변화가 가져다 올 이점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잃어갈 것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기술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은 그저 우리를 행복하게만 할 것인가 혹은 그 변화가 낳게 될 또 다른 부작용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에 대한 아티스트들의 관심과 우려가 동시에 느껴지는 전시다. 그리고 독특한 점은 미래지향, 공상과학기술이라는 주제의 전시들은 꼭 '종말'과 '환경의 파괴'와 같은 주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동시에 잃을 수 있는 것이며 이 전시의 제목이 '상실의 징후들'이 된 된 궁극적인 이유가 아닐까.

 

 

 

 

 

 

 

"<상실의 징후들>은 또 다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미리 선보이는 공상과학 전시가 아니다.

우리의 전시는 동시대에서 목격되는 기형적인 현상들과 징후들을 추적하여

도래할 미래를 경고하는 성격의 전시가 될 것이다."

 

 

 

 

 

뮤지엄원의 하이라이트 섹션이라고 볼 수 있는 미디어아트 부분이다. 16개의 연속된 작품들 중에서 몇가지 눈에 띄던 것은, "The Last amuseumt Par", "If...", "Dictator, I'm free!" 등등 체제와 환경에 대한 경고들이 인상깊었다. 특히 The Last amuseumt Park는, 다가올 2025년쯤에는 불어나는 쓰레기더미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질 매립지로 인해 아마 배출되는 많은 쓰레기들의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며 쓰레기더미에 둘러쌓인 롤러코스터 놀이기구 영상으로 현실직시를 강조하며 경고하였다. 그 외에도 지구상에 존재한 많은 자연과 아름다움, 축제, 인류, 야생동물들을 향해 마치 애도라도 하듯 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해준 지구와 인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던 작품 "If"가 던지는 울림 역시도 인상깊다. 

 

 

https://kunst1.co.kr/191

 

kunst1

쿤스트원

kunst1.co.kr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에 남았던 흥미로운 주제는 바로 <감각성형>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말 그대로 '감각'을 성형 받는 것이 미래에는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작가는 그리 머지 않은 2030년 이후의 미래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이 감각성형이라는 것은 즉 말 그대로 나의 능력치, 감각, 지능 같은 것들을 수술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엄청난 기술을 의미한다. 잠깐 옛날로 돌아가서,  처음 막 성형이 유행했을 시절을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인조인간'이라는 표현으로 성형미인에 대해 매우 높은 거부감을 나타냈었는데 성형이 대중화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불쾌감은 오히려 익숙함이 되어 성형한 인공적인 아름다움 자체도 가진자의 여유, 부의 일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할 만큼 인식의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런 것 처럼 감각 성형이라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사기'다 뭐다 여러 윤리적, 도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겠지만 결국은 이 역시도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외모 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 감각 능력 마저도 성형으로 완벽해지는 문화적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해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더 멍청하고 못생겨지게 될 것이고 부자들은 더욱 멋있고 아름답고 두뇌마저 똑똑해지는, 그렇게 돈으로 모든 것들을 성형할 수 있는 세상이 불과 2030년 이후로 도래할 수 있다는 예측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미래의 모습이 아닐수가 없다. 

 

아마 지금의 빈부격차 보다도 더 엄청난 것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꽤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상상인듯 하다. 가지지 못한자는 끊임없이 도태하고 가진자는 더욱 더 엄청난 속도로 차원이 다른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것. 더이상 자연스러움과 순수함, 진정성이 가진 매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곧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과 2030년 이후의 세상이 말이다. 과연 이런 현상들을 인류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미래의 의공학기술의 하나로 인간의 감각을 전자적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능력이 2030년경 이후 실제로 출현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 <감각성형> 시리즈의 개념은 현재 신체의 외과적 성형의술이 진화되고, 로봇공학과 메타휴먼 개념을 롤 모델로 한 인간 증강이론 등이 가속화되어 나타날 미래적인 성형술이다. 그는 '감각성형'을 통해 신체적 감각기관의 기능을 증폭시킴은 물론이고 음감, 리듬감 등 예술적 공감각 기능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것이라고 예견한다."

 

 

 

 

 

 

 

 

"과학기술에 의하여 인간이 어떤 변형을 거치게 될 지, 그리고 미래에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거나 사이버 행위자들과 유사한 형태로 변형될 때에도 인격적 존재로 남게 될 지를 좋여 언어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과학 기술이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적 존재로써의 인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컴퓨터 과학기술에 의해 인공지능과 사이버 자아 같은 존재들은 인간을 스스로와 비슷한 존재로 변형시키거나 혹은 인간 자체와 결합할 가능성 마저 열리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기계의 일부분으로 하루를 살고, 기계화는 심화되고 있고, 신체는 점점 상실되어 간다."

 

 

 

이렇듯 기계가 인간화가 되어가는 것인지, 인간이 기계화 되어가는것인지 그 구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현상들 속에서 마치 신 인류처럼 나타날 사이보그 인간을 맞닥드리게 되는 날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 할 것이며 그리고 어디까지 인격적 존재로 대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한 성형을 통해 반 기계, 반 인류적인 모습으로 발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 변화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으며 그 허용의 범위가 점점 커져갈수록 결국 우리의 자연적 신체는 상실되고 소멸되어 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 쯤되면 무엇이 AI이고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한 구분 자체가 갖는 의미가 있을까? 아마 그런 관점으로 작가는 위와 같은 형상으로 미래의 사이보그 인간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인간의 신체와 기계가 완전히 결합하게 된 바로 그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의무적인 적응의 문제가 될지, 혹은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신의 영역을 넘나드는 행위가 될 것인지 당장은 그 누구도 정확히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없다. 하지만 엄청난 기술의 발전일수록 엄청난 부작용이 함께 따르는 법. 이 놀라운 기술의 발전을 보면서 공상과학의 신비로운 감상과 더불어 왠지 모를 불쾌감과 불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건 인간으로써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까도 언급했던 <감각성형>을 비롯해서 기계가 인간의 신체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 대중화가 되는 시대에는 과연 얼마나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될지, 지금 현재도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어감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지만 사실 곧 다가올 미래는 이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 초래할 날들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감상자로써 사실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https://place.map.kakao.com/445992627

 

뮤지엄원

부산 해운대구 센텀서로 20 (우동 1469-1)

place.map.kakao.com

 

기간2023.06.10.(토) ~ 2024.05.15.(수)
장소뮤지엄 원

 

 

https://youtu.be/wY4bW63lplA

 

 

 


 

" 이상한 건 걔들이 아니라, 나였다. "

- 지성은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 주된 힘을 '위장'(변장)을 통해 펼친다.

 

 

 

최근 다소 충격적인 영상을 접했다. 평소에 '길연구소'님 유튜브를 가끔 보는  편인데 약간 MBTI 과몰입러 이기도하고 여러모로 심리쪽으로 많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루시는 것 같아서 평소 구독하는 채널 중의 하나이다. 근데 '니체의 선물'이라고 올라온 이 영상은 이 이 포스팅의 제목처럼 '진실'이 너무도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영상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보통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인데, 그 사람들은 되려 대체 이제와서 이게 왜 놀라워?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진실'과 '솔직함'에 굉장히 예민하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상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나 같지 않다." 라는 진실을 어서 깨달아야 한다.

 

 

'진실'과 '솔직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든 또는 어떤 상황에서든 무엇이 맞고 틀린가?에 대한 추구이면서 이것은 어쩌면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행동일 수도 있다. 즉 진정성, 무엇이 진짜인가를 찾아 헤매고 갈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관계에서 '솔직함'과 '진실성'이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실 추구를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이상으로 즉,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진실을 쫓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는 당신이 사실은 '별종'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아마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즉 쉽게 말해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생존 본능은 진실 추구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남을 속이는 행위에 더 가깝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단순 성선설, 성악설 같은 것을 말한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두뇌는 생존을 위해서 각자의 '전략'을 꾸려 살아가고 그것은 다른말로 트릭이라고도 하지만 결국 '속이기' 행위 인 것이다. 즉 생존은 = 속임수. 전략이라는 그럴싸한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곧 속임수인 것이다. 스포츠로 얘기하면 가장 이해가 쉽다. 가끔 최하위 팀이 최상위 팀을 꺾고 우승해버린다던가, 어떤 반전을 뒤집는 경기들을 보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트릭', '전략'이 제대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축구든 복싱이든 마찬가지로 내가 이렇게 공격 할 것 '처럼' 해놓고 사실 다른 방식으로 교묘하게 상대를 속여서 득점을 따내고 이런 모든 것들이 이기기 위한 속임수이며 전략이고 그것은 반칙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당연히 인간사회에도 적용되며, 이것은 가족관계든 친구든 연인이든 할 것 없이 그냥 생존 본능으로써 우리는 상대를 속이고, 그럼으로써 나를 이 사회안의 인간 생태계에서 더 '생존'에 유리한 위치에 자신을 놓으려는 행위들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흔이 NT들에게 또는 TJ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진실'과 '팩트'가 무엇인가에 굉장히 집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상황을 예로들어, 사람들은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했을 때 대부분 불쾌감을 느낀다. 근데 자세히 살펴보면 '진실되지 않음'에 대한 불쾌감도 물론 있겠지만 사실 그 보다는 그 거짓으로 인해 내가 볼 '피해'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진실되지 않은 사실이 내게 전혀 불쾌감을 주지 않고 되려 이득을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아마 그 '거짓'을 별로 신경쓰지도,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놀랍지 않은가? 심지어 설사 '진실'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내게 불쾌감을 가져다 준다면? 또는 해가 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에 적대적이게 된다. 이게 인간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 인간성 따위를 논하는 이야기라기 보다, 그냥 인간의 두뇌가 애초에 진실 추구를 하기 위해 여지껏 발달되온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이며 우리는 '속이기'와 같은 전략을 머릿속으로 잘 꾸려왔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뇌는 바로 그런 것들을 잘 하기 위해서 발달되어 온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처음부터 이런 짓(속임수)을 하기 위한 것이고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진리 탐구용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은 본디 진실을 탐구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원래는 다른 이유, 즉 천적이나 포식자를 속인다던가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런 실질적인 목적에는 관심도 없고 엉뚱하게도 나의 궁금증,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해소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즉 결국 '변종'이라는 것이다. "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인간 두뇌의 실질적인 원래 목적, 천적이나 포식자를 속여서 내가 생존하기 위한 것에 대한 고민, 몰두보다 나의 궁금증 해소, 진실 추구 따위에 많은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혹시 나 자신인 것 같다면...  바로 당신이 변종인간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많은 NT인들은 이 사실이 굉장히 실망스럽고 인간 세상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며 모든것들이  갑자기 의심스러우며 죄다 회색빛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진실을 쫓고자 하는 당신들은 사실은 굉장히 '별종'에 가깝고, 남을 속이고 속임 당하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가는 저 인간들이 실질적으로 본래의 뇌의 역할과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들을 하며 사아가는 정상적 인간들이라는 사실이 아주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신도 당장 당신의 보다 나은 생존을 위해서 얼른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그렇게 하십시오! 따위의 말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과한 행위는 결국 범죄가 되고 그런 범죄들이 사실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라는 이유로 그것을 '맞다'라고 부추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일상적인 미묘한 행위들은 사실 인간의 생존 본능에 기반한다 라는 팩트 자체를 전달하려는 것 뿐인것이다. 그래서 이 일상적인 '속이기' 행위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이토록 '진실'에 목을 매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순진하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침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솔직함'과 '진실'추구가 굉장히 큰 가치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속이고 기만하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수준이 떨어지는, 질 낮은 인간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은, 속고 속이는 이 혼잡하고 번잡한 세상에 니체가 던지는 말이 뭘까. 어차피 너네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할 것이고 인간의 두뇌는 본디 속이고 기만하기 위함이므로 인간 혐오를 느끼며 살아가라. 같은 극단적인 이야기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니체야 말로 '진실'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파고들고자 하는 인간 중에 하나였겠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이 하찮은 '언어'라는 도구로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도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언어로써 우리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표현하지만 사람마다 진실의 정도는 차이가 있었고, 누군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꽤나 진실됐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다른 누구가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결국 언어로써는 그것들을 설명하는데 큰 한계를 가진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르다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몰두하기 보다 그냥 그런 삶의 모순을 인지하고 살아감 자체에 매 순간의 소중함과 기적을 느껴라는 것이 어쩌면은 니체가 건네는 얘기일 지도 모른다. 과연 이 엄청난 통달을, 뼛속깊은 NT인 나로써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도 절대 쉽지않은 부분이겠지만 그렇게 삶과 인간의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그게 매우 진실되지 못하고 부정한 것들이 섞여있다 할 지라도 그 모양 그대로를 두루 보며 살아가는 방법 자체를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어쨌거나 인간은 지능적인 동물이고,  특히 인성과 인격은 그 인간의 깊은 본연의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도 지능에 해당된다고 본다) 전혀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남을 이용하며 속이는 행위를 그야말로 남발하는 사람들은 그 천성 자체가 매우 미천한 부류라고 본다. 타고난 사기꾼은 잔머리 굴리는 능력과 낮은 도덕성, 그리고 상대를 혼란에 빠뜨릴 화려한 말발과 연기력, 최소 이 몇가지 조합이면 완벽하게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성숙한 인간이라면, 니체가 아무리 그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행동들이 인간의 생존본능에 의한, 원래 두뇌 발달의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건강하고 성숙한 나 자신을 원한다면 '생존' 목적이랍시고 그런 부정적인 행위들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저급한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성숙한 고지능의 인간들이 해야될 것은, 도처에 널리고 널린 어리석은 사람들, 언제나 기회를 엿보고 상대를 공격하고 기만할 준비태세를 취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게 주의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될 뿐이다. 

 

 

 

 

 
 


 

"치유의 기술"

 
 
2022.03.26 ~ 2023.05.07
 
참여작가 
김용민, 고창선, 김병종, 김상우, 김유정, 김지민, 김진, 노주련, 박자용, 변경수, 신기운, 유의정, 이명호, 이지영, 임상빈, 정혜련, 조은필, 조정현, 차민영, 차재영, 하원
 
주최  쿤스트원
주관  뮤지엄 원
협찬  코리아싸인, 로카보어 테이블, 라이필, 닥터피엘, 니어리스트 벗 로스트, 써모스, 스너프해리, 로에, 푸푸리, 비아케이스튜디오, 라발스호텔, 포도, 바게뜨양
 
 
 


 

해운대에 위치한 '뮤지엄다'에서 전시중인 '치유의 기술'을 관람하고 왔다. 3월부터 진행된 전시로 5월 7일이 마지막날이니 곧 마감되는 전시다. 그나저나 치유의 기술이라니. 마음의 힐링에도 드디어 기술, 테크닉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장 그 말이 바로 이해가 된다. 마음의 치유에도 노련함과 기술이 필요한 사회가 된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며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지만 빨리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아는 개인의 '기술력'의 차이에 있는것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나간 긴 시간동안 나의 치유의 기술은 굉장히 모지랬고 어설펐고 나약함 그 자체였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전시에서 얘기하는 '치유의 기술'이라는 것이 내가 말한 기술과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치유라는 주제와 정말 말 그대로 '기술' (영상물이나 LED 설치 작품을 의미하는)을 접목한 미디어 아트 전시라는 의미를 뜻한건지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간에 전시관람으로부터 잠시라도 힐링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게 아닐까 싶다.  전자의 의미든 후자의 의미든 관람자가 더 와닿는 방식으로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해석해 보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예술 작품 관람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니 말이다. 
 


 

 
 
 

"치유는 상처받았음을 근거로 한다. 상처를 삶을 통해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삶, 다시 말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가장 큰 치유의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그것의 근거이다.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가 꼭 여행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궤적에서 아주 조금 이탈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예컨대 길을 걷다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소소한 실천 따위가 말이다. 물론 물리적 행위 자체가 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리적, 신체적 행위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난 뇌가 새로운 환경이나 행위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인지하는 과정이 결국 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치유는 익숙한 상황이나 경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게 된다. 일상 속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과정은 직접적으로 신체활동을 하지 않고도 매우 효과적으로 사유를 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이 심리적 안정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시가 대단히 거창하게 치유의 방법이나 삶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치유의 기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가장 진보된 조형 언어와 미학적 감성을 동원해 본인이 경험하고 사유한 현실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관객은 작가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물을 마주하면서도 극단적인 비현실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치유와 효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 중에서도 특히 관객의 사유에 초점을 맞추어 기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전시에 참여하는 현대 미술가들이 목격한 시대에 관한 메시지와 그것을 집약한 결과물들을 찬찬히 따라 걷다 보면 예술과 치유의 본질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위의 전시 소개에서 읽어보듯, 결국 치유라는 것은 익숙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궤적에서 아주 조금 이탈 하는 사소한 방법들이 결국 우리의 뇌와 기분을 새롭게 환기시켜 주며, 그것으로 얻는 소소한 새로운 영감들이 우리에게 치유 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내용은 정말이지  내가 매우 깊게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며 즉 전시를 보는 가장 큰 목적과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상처받음이란, 곧 휴식을 필요로 하고 그 휴식을 통해 다시 에너지를 재충전하며 치유의 과정을 얻기 때문에 휴식의 방법은 제 각각 다를지라도 일반적으로 '내가 늘상 머무르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가장 물리적으로 쉽고 빠르게 머리를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라는 휴식을 가장 달콤한 치유의 방법으로써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행'은 상황에 따라 많은 시간적 여유와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종종 쉽게 얻을 수 있는 휴식의 수단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것에 대한 무료함과 지루함, 스트레스 같은 감정들을 오래 잘 견뎌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익숙함이 편안하고 낯선 변화가 어쩌면 불편하거나 스트레스인사람) 똑같은 반복의 연속을 쉽게 지루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따분한 일상에 대한 스트레스를 더욱 예민하게 받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더 자주, 여러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여 소소한 치유의 시간을 자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즉 다양하고 창의적인 치유의 경험을 원하며 갈구하는, 조금은 'picky'한 부류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오감의 자극을 느낄줄 아는 섬세하고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관람' 이야 말로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정신적 리프레쉬를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고 수단이며 결국 이것은 예술 전시를 관람하는 주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일상속에서 쉽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들에 대해 깊은 사유를 시도 해본다는 것 자체가 개인에게 직, 간접적으로 새로운 영감을 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좋은 치유의 수단인 것이다. 이 전시가 바라는, 관람자들이 함께 전시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는 목적에 부합하듯이 나 역시도 미술 관람, 예술 관람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치유와 더불어 신선한 감각을 느껴보고자 하는 나의 본능적인 움직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처럼 이렇게 인간의 본질적인 감각을 두드리고 자극하는 주제들은 언제나 내게 호기심과 영감을 안겨다 준다. 

 
 
 

작가소개 및 작품설명

https://kunst1.co.kr/185

 

kunst1

쿤스트원

kunst1.co.kr

 


 
 

 
 

 

 

 

티켓예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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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예약 :: 치유의 기술

58만명의 관람객이 경험한 <완전한 세상>, <수퍼 네이처>를 넘어설 '뮤지엄 원'의 세 번째 전시 <치유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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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복지 시스템이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숨고' 어플을 통해서 우연히 알게되어 이번에 신청해보게 되었다. 사실 나도 이제 막 카드발급 신청이 완료되어 오늘 카드를 배송받고 이제 상담센터를 예약한 상황이라, 심리상담의 퀄리티에 대한 후기를 당장 풀 순 없지만 일단 이러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특히 이런 분들께 추천해주고 싶다.

 

그동안 수차례 신경과를 드나들며 약 복용을 해왔지만 병원가서 약만 타오는 것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고 진지한 상담을 해보고 싶은 분들. 또는 어떤 신경질환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평소에 심리상담을 받아 보고 싶었지만 비용이 부담되어 해보지 못했던 분들. 이런 분들께 굉장히 좋은 복지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심리상담을 받아 보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자주 해왔지만 막상 받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비용적인 부담감이 컸다. 심리상담 비용도 물론 제각각 다르겠지만 최소 한시간 기준으로 3~4만원부터 시작해서 10만원까지 꽤 만만치 않은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굳이 뭐.. 이 정도까지 비용을 들여서 내가 상담을 받아야 할 심각한 수준일까? 또는 그냥 병원에서 얼마간 약을 처방 받으면 나으니까 병원이나 다니지 뭐. 라는 생각으로 늘 귀결되곤 했는데 우연히 '숨고' 어플에서 심리 상담 관련 정보를 찾던 중에 어떤 상담사께서 이러한 복지를 통해서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지원 받을 시에 1/10 가격으로 상담이 가능하니, 신청해보시라는 제안을 받고 찾아보게 되었다. 그게 바로 "국민행복카드"다. 

 

즉 한시간에 8~10만원짜리 상담을, 단 돈 8000원~1만원에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심리 상담이 절실하거나 꽤나 필요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복지가 아닐 수 없다.  

 

 

 

  

 

 

 

 

위 서류에 따르면 이미 접수 기간이 지났다고 실망할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나도 3월 중순~말쯤에 신청을 해서 카드를 발급받았고, 예산 소진시까지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신청을 해보는 것이 좋다.

 


 

카드신청방법

 

1. 먼저 가까운 주민센터를 방문하여 "청년마음건강지원 심리상담"을 위한 신청 서류를 작성하려고 왔다고 이야기 하면 된다. 그러면 몇가지 서류를 작성하기만 하면 접수는 간단하게 끝이난다. 물론 신분증 지참은 필수.

 

 

2. 그러고나면 '사회서비스전자바우처' 채널에서 카톡이 온다. 신청하신 서비스 접수가 완료 되었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민행복카드' 발급이 필요하며 가까운 카드 영업점 "은행, 우체국, 카드센터" 등등을 방문하여 카드를 신청해달라고 연락이 오는데 나는 우체국으로 결정했다. 

 

 

 

3. 우체국으로 가서 국민행복 카드 발급하러 왔다고 얘기한 후, 발급 신청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면 된다.

 

 

 

4. 그러고 몇일 기다리면 아래 카드를 자택으로 직접 배송해준다. 

 

 

5. 그러면 이제 어느 상담 기관을 선택할지 결정해야한다. 그냥 아무 상담소를 가는게 아니라, 이 전자바우처를 쓸 수 있는 심리삼담센터를 검색해야 하는 것이다. 

 

 


 

상담센터 찾아보고 예약하기

 

 

1. 포털에 "사회서비스전자바우처"를 검색하고 상단에 뜨는 사이트로 접속한다.

 

 

 

 

 

2.  홈페이지 메인 상단 탭에서 "서비스기관검색 - > 지역사회서비스투자사업 서비스별검색" 을 선택한다.

 

 

 

 

 

3. 그리고 현재 거주중인 곳으로 설정한 후 서비스 유형에 "청년마음건강지원"이라고 입력한 후 조회 버튼을 누른다. 예를들어 서울특별시/강남구로 설정한 후 청년마음건강지원으로 검색한 후, 청년마음건강지원사업 이라고 뜨는 아래 텍스트를 클릭한다.

 

 

 

 

 

4. 그러면 아래와같이 정말 많은 수의 상담센터들이 조회되는데, (지역에 따라 2~3곳 정도 적게 조회되기도 함) 아래 상담 센터들이 이 전자바우처를 사용 할 수 있는 곳들이라는 뜻이며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센터로 고르면 된다. 예약은 이 사이트에서 하는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서 예약을 잡으면 된다. 팁을 드리자면 일일히 센터를 검색 해서 그곳의 리뷰나, 상담사의 이력이나 자격증 정보들을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 곳으로 선택하면 좋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하면 모든게 완료되었으며 센터에 예약한 날짜에 맞춰 카드를 지참한 상태로 상담을 받으러 가면 된다. 나도 아직 상담을 받아보기 전이라, 상담의 퀄리티나 질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좋은 시스템인 것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이 정보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예산이 남아 도는(?) 상황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아직까지 신청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고 짐작해본다.

 

이 복지도 사실 신청 조건에 우선순위가 있었는데, 예를들면 1순위, 2순위가 이제 막 사회에 독립하는 막 출소한 청년들이나 사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심리상담이 매우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회 소외계층 청년들이 우선순위 대상에 먼저 있었고 마지막 3위가 일반 청년들이었는데 워낙 신청자가 없어서 우선순위에서 탈락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평소에 심리상담을 꼭 한번 받아보고싶었지만 비용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 미루왔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 신청 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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