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 제너레이션 The Pod Generation, 2023 제작

요약영국 코미디 외 2023.10.03 개봉 12세이상 관람가 109분감독소피 바르트출연에밀리아 클라크치웨텔 에지오포로잘리 크레이그비넷 로빈슨  더보기줄거리임신/출산 2.0이제는 팟이 대신 낳아드립니다. 기술이 자연을 능가하게 ..더보기

 

팟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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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포털 별 평점을 보니, 말도 안되게 별점 테러한 사람이 있던데 개인적으로 그 평점은 절대 이해할 수가 없음.) 

 

 

오랜만에 굉장히 인상깊은 영화를 하나 감상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팟 제너레이션". 말 그대로 자연적 출산이 아닌, 인공지능 알을 통해 아기를 만들고 출산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사실 요즘 내가 SF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더이상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마냥 공상과학속에서만 머무르는 소잿거리가 아니라 충분히 우리 일상속에 실현 가능한 소재로써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Her를 봤을 때도 일상속에 스며든 인공지능과의 러브스토리가 굉장히 인상깊었던 것 처럼 이 영화 역시도 우리 일상 깊숙히 들어온 인공지능 세상의 모습을 매우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은 똑부러는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한다. 그의 남편은 딱히 그렇다할 수익은 없지만 식물학자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있다. 주인공은 회사로부터 '자궁센터'의 복지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매우 관심을 갖게 되지만 한편으로 '자연적'인 임신 방식을 원하는 남편의 눈치가 보여 몰래 자궁센터를 방문하고 설명을 듣고 온다. 그러나 결국 남편에게 고백하게 됨으로써 둘은 인공적인 임신과 자연적 임신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발생하지만 결국 남편을 설득하게 되고, 그들은 인공 출산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엄마의 자궁 역할을 하는 기계의 이름이 바로 '팟'이다.

 

 

 

 

그녀는 '팟'으로 아이를 출산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도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악몽을 꾸기도 하고 여러모로 심란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며 다소 평소보다 떨어진 생산성에 대해 회사로부터 지적받게 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인간의 생활 깊숙한 곳에 AI 시스템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든 스케쥴과 그 날 입을 옷 등등 사소한 사생활 일부까지 모두 관여하는 그녀의 AI는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오늘 그녀의 컨디션과 기분이 어떤지, 요즘의 그녀의 에너지와 생산성이 어떤지에 대해 모두 파악이 가능하다. 그렇다보니 심리상담의 영역에서도 AI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녀는 심란한 마음의 원인과 이유를 찾고싶은 마음에 AI 심리상담가를 찾아간다. 이 장면 역시도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대게 AI 시대가 초래함에 앞서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일 것이라고 자부했던 예술이나 심리 상담 등등 감성이 스며들어 있는 직업군은 AI로 쉽게 대체되지 않을것이라고 사람들은 자부했지만 실제 AI 세상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미 미술이나 문학 음악 등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 AI는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고 그 외에도 심리상담이나 철학가, 종교인의 영역 까지도 어쩌면 AI가 인간보다 더 우월하고 우수한 통찰력으로 방향성과 문제 해결을 제시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전문가들의 그런 예상을 정확하게 예로 들어주는 아주 적절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이 생김새 섬뜩한 외눈박이 AI 상담사는 주인공의 원인 불분명한 불안한 마음을 잠재워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편리함을 제공하는 줄로만 알았던 '팟'이라는 인공 자궁 시스템에도 여러 불편이 따르는 장면들이 등장했다. 여성의 임신으로 인한 경력단절, 신체적 변화, 호르몬 변화 출산 후 후유증 등등 임신이라는 것 하나에 따르는 여러 희생과 불편함들을 모두 제거해주는 '팟'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자궁센터'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대기자들이 이 팟을 대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팟을 어느정도 자유자재로 지니고 다닐 순 있었지만 완전히 100%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부부는 출산일이 임박해오면 집에서 하는 가정출산을 원했지만 자궁센터에서는 그것을 거부하였고 많은 대기자들 때문에 팟을 다른 고객에게 다시 대여를 해줘야 하므로 기기 손상이나 훼손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부는 자궁센터의 통제를 완전히 거부했고 그러자, 자궁 센터는 팟을 키우는데 필요한 리모콘 앱 시스템을 원격으로 연결 해제 해버린다. 사실 이 앱

은 팟을 키우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계장치인데, 팟을 통해 아기에게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팟과 연결된 시스템 장치를 조종하는 아주 중요한 기기라고 볼 수 있다. 아기에게 영양분을 먹일 시간을 알려주기도 하고 모든 통제 기능이 이 앱에 연결되어 있는데, 자궁 센터는 부부의 출산일을 몇일 앞두고 연결 기능을 완전히 해제해버린다. 하지만 부부는 어차피 곧 출산일이 임박한것을 알고 자궁센터에 가지않고 원래 그들이 원했던 방식으로 집에서 자연 출산을 시도한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은, 인공적인 출산 방식을 선택한 그들이지만 아기와의 유대감 형성 이라든지 가정 출산을 하고싶어하는 점 등등 자연적인 방법들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깊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시사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앞서서 우리는 천천히 AI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분명히 다 해결되지 않을 갈등이 존재할 것이며, 그 간극을 어떻게 어떤식으로 밸런스 조절을 하며 현명하게 대처 할 것인지, 바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그런 숙제들을 넌지시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또 한가지, 영화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이 '팟'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극 페미니스트들은 팟의 등장을 환영할 줄 알았는데.." 라는 대사가 있는데 나 역시도 이 부분이 의문스러운 점이다. 영화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왜 이 인공지능 자궁 시스템을 강력이 반대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나오지 않았는데 이 장면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왔다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영화속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왜 AI 자궁을 거부하였는지에 대해서 그렇다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팟을 만든 최초의 설계자, 대표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터뷰어에게 이 대표자는 "팟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라는 질문을 하자 인터뷰어는 "산모와 부부들이요?"라는식으로 대답하지만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오, 바로 아기들이 주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팟의 주인공은 부모들이 아니라 아기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아기들이 부모님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겠죠. 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난다. 사실 아기는 부모로부터 그들의 유전자를 물려 받음으로써 탄생하게 되는 존재들인데 이것이 거꾸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떤 구조와 시스템이 그것을 실현가능하게 한다는 것인지 굉장히 큰 궁금증을 남기며 끝이 났다. 

 

굉장히 소재적으로 신선함 그 자체였고 심지어 이 팟은 남자의 유전자 없이, 여자의 유전자 만으로도 아기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즉 동성애 커플이나 부부들도 이 팟을 통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노고에서 해방된 미래 AI시대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물론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연 임신을 하는 여성들이 등장했지만 사실 이 '팟' 시스템은 꽤나 비싼 가격이므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팟'을 통해 임신 한다는 것은 사실상 영화속에서 상류층을 의미 하기도 했다. 아무튼 자연적 임신과 인공적 임신이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의 미래 세상을 미리 엿보고 온듯한 독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기개발도서를 매우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매우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있다. 요즘의 자기개발 도서들은 그냥 성공한 누군가가 자기 인생 자서전 쓰는게 아니고 뭐냐. 싶은 생각 말이다. 물론 자신의 우여곡절 인생을 나열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노력했는지에 대한 썰을 풀면서 그 안에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치만 그냥 성공한 누군가의 '책팔이'인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나 요즘처럼 sns같은 플랫폼에서 인기를 크게 끌어서 작가가 된다던지 하는 그런 사례들이 점점 많기 때문에 자기개발도서를 볼 때 이건 또 어떤 류의 자기개발도서인가? 싶은 생각에 약간 검열의 눈으로 지긋이 볼 때가 많다. 이 책도 굉장히 시선을 끌 만한, 눈길을 끌어당길 만한 카피를 적어놓았다. "하루 14알 정신과 약 먹으며 자본주의에서 상위 0.1%가 된 악인의 성공 쿠데타." 일단 여기서 눈길이 가는 대목은 단연 "하루 14알의 정신과 약" 이라는 거다. 14알? 굉장히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있다고 해도 6-7알 정도 매일 먹었던 사람은 본 적 있는데 14알이면 치사량 아닌가 싶을 수준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영화 '조커'에서도 그 미치광이 조커가 먹는 정신 질환 약도 7알 정도인데 이 분은 자그마치 14알을 먹으면서 살아가신단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악인'이 되라 말해주고 있다. '악인'. 이 책에서 설명하는 '악인'이란 뭘까. 

 

 

첫번째로 이 책은 자신에게 분노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분노'는 곧 성잘할 에너지 자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치면 나는 굉장히 자원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많은 분노가 내제되어 있을 수록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과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다. 라는 식의 설명이 흥미로웠다. 책에서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첫번째 자기개발 방법으로 '분노일기'를 쓰라는 내용이 있었다. 사실 나도 그 날 하루에 대한 나의 감정과 느낌, 짧은 몇 줄 평 정도로 핸드폰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주로 내가 하던 방식은 Bad things와 Good things를 나누어 적는 것이었다. 일단은 오늘 하루 별로였던 일이나 사건, 내 감정에 대해 먼저 쓴다. 그 다음으로 오늘 하루 좋았던 것들 (매우 사소한 부분 까지도) 몇가지를 쓰는 것이다. Good things를 나중에 썼던 이유는 그래도 긍정적인 마무리를 하고싶었던 마음에서 였다. 어쨌거나 이 책의 저자는 되려 독자들에게 그날의 분노를 5줄 이상 매일 꼭 쓰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적어내려가며 본인이 진짜 원하는 욕구가 뭔지 찾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만약 오늘 하루 나 자신이 게을러서 분노를 느꼈다면 그 내용을 고스란히 적고 나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 적극 분노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인사와는 아주 다른 부분이다. 대게 오늘 하루에 내가 무엇에 감사함을 느꼈느냐에 대해서 써라는 식의 말은 많다. 저자 역시도 원래는 아무리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냈다해도 그날 마신 커피 한잔이 맛있었으면 된거잖아. 라는 식의 감사 인사를 스스로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그냥 자기 안일함, 합리화에 불과한 멍청한 짓이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감사일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하려거든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감사만 하라고 추천하고 있다. 가령 내가 사는 곳 근처는 산책하기가 참 좋은 곳이야. 등등 말이다. 본인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섣불리 '합리화'를 저지르는 실수를 범할까봐 절대, 감사일기는 쓰지 말고 분노일기를 써라. 그것이 원동력이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부분이 인상깊은 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분노일기와 감사일기를 동시에 쓰고 있었던 샘이다. 사실 매일 매일 부정적인 글을 5줄 이상 쓰는게 정말 정신건강에 괜찮은걸까? 라는 의아함과 궁금증이 들었다. 뭐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감사일기를 쓰든 분노일기를 쓰든 원래의 목적에 맞는 의도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문제되지 않는 것 아닐까. 제 아무리 삶의 긍정적인 태도를 갖겠다고 감사일기를 써내려 간들, 그것이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면 무슨 좋은 영향력이 있겠으며 분노일기도 마찬가지로 오늘 하루 기분나빴던 일화나 감정에 대해 줄줄 써내려 가는것이 혹시나 그저 그런 화풀이에 지나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영양가가 있겠느냔 말이다. 저자는 사실 감사일기 쓰는것을 추천하지 않고 있지만 나는 이 두가지의 긍정적인 영향에 부합하는, 어긋나지 않는 글쓰기를 한다면 둘 다 써도 괜찮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감사일기는 절대 자위가 되어서는 안되고, 분노일기는 절대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분노일기의 목적은 나의 분노 원인을 찾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것 그리고 내 삶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내게 방해되는 모든것들 또한 (사물이든 사람이든 할 것 없이) 샅샅이 찾아내서 숙청(?) 하고자 하는 목적에 있다. 반대로 감사일기는 오늘 하루 내게 일어난 긍정적인 일이나 변화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으며 그 감사한 마음을 새겨 둘 수 있다는 부분이 장점인 것 같다. 아무튼, 제 목적에 맞게만 쓴다면 감사일기든 분노일기든 다 괜찮은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저자는 좀 더 독자들에게 '공격성'을 갖추기 기대 한다는 느낌이었다.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챕터들도 몇몇 구간 있었지만 미친 경쟁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공격력은 갖추고 있어야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새삼 들면서 개인적으로는 공감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절대 오해하는사람이 없길 바란다. 저자는 건강한? 개성있는 '악인'이 되길 바라는거지 무분별한 이기주의로 똘똘뭉친 '빌런'이 되라고 추천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사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한 문장도 몇몇군데 있었다. "내가 가스라이팅 당할 것 같다면 차라리 행하는게 낫다"라는 식의 문장이 있었는데 나는 이 말을 이해하면서도  동의하긴 어려운 입장이다. 내가 세상에서 끔찍하게 싫어하는것이 바로 '내로남불' 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철없는 햇병아리같은 멘탈의 소유자가 이 책을 잘못 읽는다면 나쁘게 해석할 요소도 분명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유용하고 좋은 도구들도 누군가는 가장 나쁜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듯이, (본래의 목적과 의도가 변질된다는 의미) 책이라고 예외는 없으니 말이다. 혹여나 그를 '잘못' 추종하는 독자들은 부디 없길 바란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공격성을 곧이 곧대로 남에게 해를 끼쳐도 상관없다. 라는 식으로 머릿속에 입력하면 큰 오류가 될 것이다.

 

 

무튼 책 '카르마'를 읽은 사람으로써 남에게 의도적으로 행한 '악'은 분명히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모든 분노의 근원과 원인을 내게서 찾고, 내 문제점을 전투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내게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이 있다면은 반드시 숙청하라는 것이 깔끔한 정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느슨해진 멘탈 상태에 꽤나 탄탄한 긴장감과 영감을 불어 줄만한 재밌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자기개발 도서에 비해서도 쏠쏠한 실질적 팁들, 방법들에 대해서도 많이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냥 제 인생 썰 풀다 간 느낌 보다는 훨씬 영양가 있는 글들이 있었지 않나. 라고 평가해본다.

 

 

그리고 '돌아갈 곳을 만들지 말라'는 내용 역시 기억에 남는 부분인데, 그 순간 문득 이러한 생각이 스쳐갔다. 사실 나는 지금, 돌아갈 자리를 열심히 꾸리기 위해 그것을 다듬고 노력하는 중인건가? 라는 생각이 말이다. 이 부분도 굉장히 호불호가 나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약간 플랜B를 구성하지 말아라. 라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플랜B가 없이 살아온 행적이 있었고 저자처럼 공격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몰라도 무모하기만 하고, 대책이 없었다. 내 모든 노빠꾸 노선들은 다 실패였었고 상처만 남았기에, 다소 저 글은 내게 무서운 문장이다. 돌아보지 말고 그냥 번지점프해!! 라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하나. 물론 돌아갈 자리가 없을 때, 그만큼 절박한 환경으로 나를 몰아넣을 때 즉 한계로 몰아넣을 때 인간의 잠재된 능력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동의하는 바 이지만, 개개인의 성격적 특성에 따라 누군가는 따라해도 좋을 법 하고 누군가는 괜히 그렇게 했다가 핵 낭패를 당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진하게 든다. 사실 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에게 좀 더 '여유'가 있는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 여유는 우리에게 숨 돌릴 틈을 주고, 그 휴식은 생각을 더 유연하게 한다고 본다. 사실 책에서 저자가 종종 '펜트하우스'에서 나를 바라보기 시점에 대해 설명 하는데, 사실 바로 그 객관적으로 거시적인 시야로 나의 상황을 관찰하는 태도가 바로 나는 '여유'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같은 사람은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면서도 그런 '메타인지'가 동시에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기가 오히려 스스로 굉장히 큰 생산성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지만 보통의 '판단력' 이라는건,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건강한 판단 또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므로 여유가 없고 빡빡한 상황,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인간의 판단력이 극도로 떨어지는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극한의 상황이 자신을 매우 성장하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되려 너무 큰 부담이 되어 공격력은 커녕 반대로 움츠러 드는 인간도 있을테니 말이다.  

 

 

아무튼 회사 대표에게 뺨을 맞아가며, 그리고 지독한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회사에서 자리를 버텨낸 저자는 대단하다면 정말 가히 대단한 사람이며, 다른 누군가가 봤을 때는 저렇게 참아내는것이 과연 정신건강에 이로운 건가?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는게 맞는거지. 라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테니 말이다. 정답이 뭐가 있을까. 모든 자기개발도서에서 제공하는 지침들을, 컴퓨터 소프트웨어 마냥 내 몸에 다 셋업해보고 안맞으면 다시 삭제. 이것이 단 몇분 몇초만에 이루어지면 너무 편안하겠지만 인간은 그럴수가 없으니, 그래도 각자 살아온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내게 잘 맞을 만한 지침들을 적용해보고 천천히 실험해보는게 옳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 역시도 본인에게 맞지 않았던 흔한 자기 개발 지침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이 등장하니 말이다. (아침 일찍 기상해야 한다는 부분에 대한 비판) 결국 내게 맞는 지침서는 스스로 알아서들 만들어 나야겠지만 이런 자기개발 도서들은 그나마 아예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 혹은 당장 무기력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혹시 이런 방법은 어때, 나는 이렇게 했는데 이게 좋더라. 라고 몇가지 방법과 아이디어들을 추천해주는거니, 실행해보고 내게 도움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버리면 된다. 저자 역시도 많은 자기개발도서들이 주장하는 청소하기와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부분을 열심히 시행해봤지만 자기 자신에게 잘 맞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것 처럼, 일단 자기개발에 대한 바탕이나 베이스가 없다면 뭐든 시도해보고 아닌 것들을 가려내는 프로세스도 성장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개발 도서를 읽는것은, 그것들을 신봉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의 경험과 이야기가 내게 일말의 영감과 작은 영향력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흥미롭고 매력적인 자기개발 도서는, 분명히 그러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많은 자기개발도서들 사이에서 내게 딱 걸맞은, 그런 주옥같은 책을 가려내고 찾기 위해서 그 많은 사기성 짙은 책들에게 배신당하면서도 또 읽는 것 아닐까. 배신의 경험도 있어야만, 진짜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생기니까 말이다. 아무튼 뭐, 이 책이 진국이다 아니다를 내가 논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이것이 그냥 내가 자기 개발도서를 읽을 때의 내 마인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저자가 말하는 '공격성'이나 다른 여러 자기개발을 위한 팁들은 굉장히 대한민국 현실에 잘 어울리는 방법들이 아니었을 까 생각한다. 그냥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운' 방법들만을 제시하는 지침서가 아니기에, 그 부분이 흥미로운 책이다.

 

 

 

 

 

 

 

요즘 '용서' 라는 키워드에 조금 꽂혀있다. 나는 종교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종교에서도 그렇고 심리학자들도 그렇고 모두가 하나같이 '원수를 용서하라' 라는 똑같은 말을 내뱉는다. 사실 굉장히 익숙하지만 어찌 하나같이 저런 답답한 소릴 하는걸까 그냥 호구가 되라는 소리 아닌가. 라고 의아한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 이 말이 전달하는 의미와 깊이를 몸소 느끼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온전히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냥 흔히 말하는 '져주는게 이기는거다' 같은, 그런 소리 아니야? 즉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라. 따위의 의미로써 주로 해석했었는데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말 역시도 맞는 말이지만 '카르마'에서 설명하는 이 문장은 좀 더 추가적인 다른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카르마가 발생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줄 때. 쉽게 말해서 의도적인 어떤 나쁜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심적으로 고통을 주거나 관계 안에서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 피드백이 발생 했을 때 '카르마'가 발생한다 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카르마는 언젠가 돌고 돌아서 내가 행한 나쁜 행동의 결과가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용서'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누군가 내게 몹씁짓을 했다고 치자. 그로인해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고통에 신음했다. 여기서 나의 행동은 두갈레로 나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스스로 위로하고 다시 나 자신을 다 잡고 일어서는데 초점을 맞추는 사람, 또는 나에게 그런 상처를 준 사람을 끊임없이 증오하고 미워하며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며 칼날을 가는 사람. 누가봐도 전자의 경우가 건전하고 건강한 행동이라고 느끼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피해를 준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다. 물론 그 시간 역시도 어쩌면 필요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나. 단, 짧은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분노를 느끼는것은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 마음을 질질 끌고 오랜시간 동안 나를 더욱 더 고통에 빠지게 하느냐 혹은 빨리 그 고통에서 빠져나와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느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카르마'에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은, 그 원수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그 감정을 오래도록 내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카르마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내가 상대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기 위해서 나 역시 똑같은 행동으로,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 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도 어느정도 정당하긴 하지만 정도에 따라서 이 말이 적용이 되기도하며 때로는 부적절하기도 하다. 

 

 

어느 누군가 내게 악심을 품고 피해를 줬을 때, 나 역시 똑같은 행위로 되갚아 준다면 나 역시도 나쁜 짓을 행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이 받을 카르마는 나도 똑같은 행위를 함으로써 내게도 카르마가 발생하게 되버린다. 즉 가장 통쾌한 복수는 그냥 나 자신이 더 건강하고 발전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거다. 즉 죄 값을 받는 사람은 굳이 내가 나서서 똑같은 복수를 행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고 나는 멀리 저만치서 그 사람이 자멸하는, 혹은 파멸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아, 물론 망해라, 자멸해라 라는 식의 앙심을 내 맘속에 품고 있는 것 역시도 카르마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내 할일에 집중하고 내 삶을 열심히 사는 것,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간다는 원리 아닐까. 처음에는 나 역시도 이런 설명이 굉장히 종교적인 해석처럼 다가왔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보니, 놀랍게도 과학적으로 이런 일들이 원리원칙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내가 타고 태어난 환경, 내가 결정 지을 수 없는 운명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카르마'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즉 내가 어떤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랄것이며 어떤 경험들을 하고 나중에 어떤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등등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꽤 많은 옵션들을 미리 결정하고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가 바로 '카르마'이며, 내가 전생에 해소 하지 못했던, 혹은 그 전생에 지었던 죄나 업보 등등의 카르마를 해결 하기 위해서 그 카르마와 연관된 인물과 이번 생에 어떠한 또 다른 밀접한 관계로써 다시 연을 맺게 된다 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서부터 꽤나 불교 정서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아예 전생이라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허무맹랑하거나 근거없는 실망스러운 내용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전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느정도 호기심을 갖고있고 아예 불신하지는 않는 사람으로써, 그리고 결국 '카르마'라는 단어의 근원 자체를 찾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영적인 영역과 밀접하게 연관지어 지므로,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든것이, 모든 굵직한 운명들이 카르마에 의해 이미 결정된 채로 태어난다면 카르마 라는 것은 결국 '결정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책에서는 결정론 보다는 인과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운명이 결정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의 삶을 개척할 수 없다. 라고 말할 순 없다. 애초에 '카르마'를 해소한다는 거는, 내게 주어진 운명과 인연, 관계들 속에서 더 이상의 카르마를 발생시키지 않고 소멸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현상이 카르마의 해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더 나은 건강한 삶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건에는 이유와 원인이 있고 그것을 단순 결정론으로 단정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 의지와 상관 없는 불행에 대한 것도 '카르마'에 의한 것인가요?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예를들면 전쟁이나, 사고, 자연재해 등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공업에 의한 '카르마'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에 비해 많은 자연재해들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류가  피해 입는 것 역시도,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많은 피해들이 예를들면 환경파괴 같은 것들이 카르마로 발생하여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는데, 어찌보면 내 개인이 직접적으로 저지른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써 내가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카르마가 있기에 모두가 함께 그 카르마의 영향을 받는다. 라는 독특한 개념의 이야기였다. 

 

 

예를들어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도 해당되지 않을까.  누군가 산을 깎아 무리하게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높은 고층 아파트를 짓도록 하였을 때 이 경우에 직접적으로 나쁜 짓을 행한 사람은 아마 그 산을 깎아서 아파트를 짓자. 라는 결정적 역할을 한 국회의원일 것이고, 그리고 그 아파트를 지은 인부들은 시킨 대로 한 결과지만 어쨌거나 산을 파괴하고 아파트를 짓는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는 입주민들 역시도, 직접적인 업을 행하진 않았지만 그 곳에 거주함으로써 환경 파괴에 간접적으로 행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나쁜 기업의 제품을 잘 모르고 소비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예를들어 가학적인 동물 실험으로 제품을 생산해내는 화장품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역시도 간접적으로 동물 학대에 동조하는 것이 되 버린 것 처럼) 그리고 또 이런것과도 연관지을 수 있는 부분일지는 모르겠으나, 부모나 조상이 세상에 많은 죄와 업보를 저질렀을 때 그 자손에게까지 악영향이 가는 것도, 사실 그 자손은 본인이 직접적으로 잘못한 뭔가가 있지는 않지만 그 윗세대의 '카르마'가 너무 강력하여 자손에게 까지 그 책임이 떠안겨 가는 현상과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즉 직접적으로 내가 가담한 '업'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카르마의 영향을 받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모두가 타고난, 부여받은 환경과 운명은 제 각각 다르지만 그것이 인과관계에 의한, '카르마'와 연관지어 설명 할 수 있다는 부분은 꽤나 흥미로운 얘기거리인 것 같다. 뭔가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어야 될 부분 역시도 없지않아 존재하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라면 사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생의 출발점과 난이도가 제 각각 다른 것은 각자가 타고난 운명인 것을 뭐 어떻게 하겠는가? 중요한것은, 그렇게 부여 받은 카르마를 내가 이 생에서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소하며 살아가는가. 어쩌면은 인생이란게 넓은 의미로 보았을 때 카르마의 해소에 삶의 목적이 있는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마저 문득 들었다. 그만큼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생에서 해소해야만 하는, 이겨내야만하는 카르마는 무엇이며 그 카르마의 영향력이 크면 클 수록 힘들고 험난한 과정이겠지만 그게 우리가 해결하고 풀어야 할 숙제라면 기꺼이 해야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고 나를 성숙하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SIGNS OF LOSS'

상실의 징후들

 


 

 

뮤지엄원 지난번 전시 '치유의 기술'에 이어 이번에는 '상실의 징후들'이라는 타이틀이다. 마치 뭔가 사라져가는,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예언된 경고나 으름장처럼 느껴진다. 본격 AI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혜택과 변화를 하나 둘 얻기 시작했고 최근 큰 반향을 일으켰던 CHAT GPT라던지, 그 외에도 '메타버스' 혹은 'VR'과 같은 것들이 최근 몇년간 기술발전을 상징하는 주요 키워드들이 아니었다 싶다. 하지만 그런 미래의 기술들이 점점 일상생활 깊숙히 들어오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얻는것이 있을 때 동시에 또 잃기 마련이다. 이 전시는 우리가 과학기술을 통해 얻은 새로운 변화에 대해 시사하면서 또한,  그 변화가 가져다 올 이점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잃어갈 것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기술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은 그저 우리를 행복하게만 할 것인가 혹은 그 변화가 낳게 될 또 다른 부작용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에 대한 아티스트들의 관심과 우려가 동시에 느껴지는 전시다. 그리고 독특한 점은 미래지향, 공상과학기술이라는 주제의 전시들은 꼭 '종말'과 '환경의 파괴'와 같은 주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동시에 잃을 수 있는 것이며 이 전시의 제목이 '상실의 징후들'이 된 된 궁극적인 이유가 아닐까.

 

 

 

 

 

 

 

"<상실의 징후들>은 또 다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미리 선보이는 공상과학 전시가 아니다.

우리의 전시는 동시대에서 목격되는 기형적인 현상들과 징후들을 추적하여

도래할 미래를 경고하는 성격의 전시가 될 것이다."

 

 

 

 

 

뮤지엄원의 하이라이트 섹션이라고 볼 수 있는 미디어아트 부분이다. 16개의 연속된 작품들 중에서 몇가지 눈에 띄던 것은, "The Last amuseumt Par", "If...", "Dictator, I'm free!" 등등 체제와 환경에 대한 경고들이 인상깊었다. 특히 The Last amuseumt Park는, 다가올 2025년쯤에는 불어나는 쓰레기더미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질 매립지로 인해 아마 배출되는 많은 쓰레기들의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며 쓰레기더미에 둘러쌓인 롤러코스터 놀이기구 영상으로 현실직시를 강조하며 경고하였다. 그 외에도 지구상에 존재한 많은 자연과 아름다움, 축제, 인류, 야생동물들을 향해 마치 애도라도 하듯 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해준 지구와 인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던 작품 "If"가 던지는 울림 역시도 인상깊다. 

 

 

https://kunst1.co.kr/191

 

kunst1

쿤스트원

kunst1.co.kr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에 남았던 흥미로운 주제는 바로 <감각성형>이라는 작품이었는데 말 그대로 '감각'을 성형 받는 것이 미래에는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작가는 그리 머지 않은 2030년 이후의 미래라고 예견하고 있었는데, 이 감각성형이라는 것은 즉 말 그대로 나의 능력치, 감각, 지능 같은 것들을 수술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엄청난 기술을 의미한다. 잠깐 옛날로 돌아가서,  처음 막 성형이 유행했을 시절을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인조인간'이라는 표현으로 성형미인에 대해 매우 높은 거부감을 나타냈었는데 성형이 대중화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불쾌감은 오히려 익숙함이 되어 성형한 인공적인 아름다움 자체도 가진자의 여유, 부의 일부분으로 여겨지기도 할 만큼 인식의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런 것 처럼 감각 성형이라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사기'다 뭐다 여러 윤리적, 도덕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겠지만 결국은 이 역시도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외모 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 감각 능력 마저도 성형으로 완벽해지는 문화적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해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더 멍청하고 못생겨지게 될 것이고 부자들은 더욱 멋있고 아름답고 두뇌마저 똑똑해지는, 그렇게 돈으로 모든 것들을 성형할 수 있는 세상이 불과 2030년 이후로 도래할 수 있다는 예측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미래의 모습이 아닐수가 없다. 

 

아마 지금의 빈부격차 보다도 더 엄청난 것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꽤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상상인듯 하다. 가지지 못한자는 끊임없이 도태하고 가진자는 더욱 더 엄청난 속도로 차원이 다른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것. 더이상 자연스러움과 순수함, 진정성이 가진 매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곧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과 2030년 이후의 세상이 말이다. 과연 이런 현상들을 인류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미래의 의공학기술의 하나로 인간의 감각을 전자적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능력이 2030년경 이후 실제로 출현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 <감각성형> 시리즈의 개념은 현재 신체의 외과적 성형의술이 진화되고, 로봇공학과 메타휴먼 개념을 롤 모델로 한 인간 증강이론 등이 가속화되어 나타날 미래적인 성형술이다. 그는 '감각성형'을 통해 신체적 감각기관의 기능을 증폭시킴은 물론이고 음감, 리듬감 등 예술적 공감각 기능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것이라고 예견한다."

 

 

 

 

 

 

 

 

"과학기술에 의하여 인간이 어떤 변형을 거치게 될 지, 그리고 미래에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거나 사이버 행위자들과 유사한 형태로 변형될 때에도 인격적 존재로 남게 될 지를 좋여 언어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과학 기술이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적 존재로써의 인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고도로 발전한 컴퓨터 과학기술에 의해 인공지능과 사이버 자아 같은 존재들은 인간을 스스로와 비슷한 존재로 변형시키거나 혹은 인간 자체와 결합할 가능성 마저 열리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기계의 일부분으로 하루를 살고, 기계화는 심화되고 있고, 신체는 점점 상실되어 간다."

 

 

 

이렇듯 기계가 인간화가 되어가는 것인지, 인간이 기계화 되어가는것인지 그 구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현상들 속에서 마치 신 인류처럼 나타날 사이보그 인간을 맞닥드리게 되는 날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 할 것이며 그리고 어디까지 인격적 존재로 대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한 성형을 통해 반 기계, 반 인류적인 모습으로 발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 변화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으며 그 허용의 범위가 점점 커져갈수록 결국 우리의 자연적 신체는 상실되고 소멸되어 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 쯤되면 무엇이 AI이고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한 구분 자체가 갖는 의미가 있을까? 아마 그런 관점으로 작가는 위와 같은 형상으로 미래의 사이보그 인간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인간의 신체와 기계가 완전히 결합하게 된 바로 그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의무적인 적응의 문제가 될지, 혹은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신의 영역을 넘나드는 행위가 될 것인지 당장은 그 누구도 정확히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없다. 하지만 엄청난 기술의 발전일수록 엄청난 부작용이 함께 따르는 법. 이 놀라운 기술의 발전을 보면서 공상과학의 신비로운 감상과 더불어 왠지 모를 불쾌감과 불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건 인간으로써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까도 언급했던 <감각성형>을 비롯해서 기계가 인간의 신체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 대중화가 되는 시대에는 과연 얼마나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될지, 지금 현재도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어감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지만 사실 곧 다가올 미래는 이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 초래할 날들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감상자로써 사실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https://place.map.kakao.com/445992627

 

뮤지엄원

부산 해운대구 센텀서로 20 (우동 1469-1)

place.map.kakao.com

 

기간2023.06.10.(토) ~ 2024.05.15.(수)
장소뮤지엄 원

 

 

 
 


 

"치유의 기술"

 
 
2022.03.26 ~ 2023.05.07
 
참여작가 
김용민, 고창선, 김병종, 김상우, 김유정, 김지민, 김진, 노주련, 박자용, 변경수, 신기운, 유의정, 이명호, 이지영, 임상빈, 정혜련, 조은필, 조정현, 차민영, 차재영, 하원
 
주최  쿤스트원
주관  뮤지엄 원
협찬  코리아싸인, 로카보어 테이블, 라이필, 닥터피엘, 니어리스트 벗 로스트, 써모스, 스너프해리, 로에, 푸푸리, 비아케이스튜디오, 라발스호텔, 포도, 바게뜨양
 
 
 


 

해운대에 위치한 '뮤지엄다'에서 전시중인 '치유의 기술'을 관람하고 왔다. 3월부터 진행된 전시로 5월 7일이 마지막날이니 곧 마감되는 전시다. 그나저나 치유의 기술이라니. 마음의 힐링에도 드디어 기술, 테크닉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장 그 말이 바로 이해가 된다. 마음의 치유에도 노련함과 기술이 필요한 사회가 된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며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지만 빨리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아는 개인의 '기술력'의 차이에 있는것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나간 긴 시간동안 나의 치유의 기술은 굉장히 모지랬고 어설펐고 나약함 그 자체였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전시에서 얘기하는 '치유의 기술'이라는 것이 내가 말한 기술과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치유라는 주제와 정말 말 그대로 '기술' (영상물이나 LED 설치 작품을 의미하는)을 접목한 미디어 아트 전시라는 의미를 뜻한건지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간에 전시관람으로부터 잠시라도 힐링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게 아닐까 싶다.  전자의 의미든 후자의 의미든 관람자가 더 와닿는 방식으로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해석해 보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예술 작품 관람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니 말이다. 
 


 

 
 
 

"치유는 상처받았음을 근거로 한다. 상처를 삶을 통해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삶, 다시 말해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가장 큰 치유의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그것의 근거이다.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가 꼭 여행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궤적에서 아주 조금 이탈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예컨대 길을 걷다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는 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소소한 실천 따위가 말이다. 물론 물리적 행위 자체가 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리적, 신체적 행위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난 뇌가 새로운 환경이나 행위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인지하는 과정이 결국 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치유는 익숙한 상황이나 경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게 된다. 일상 속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과정은 직접적으로 신체활동을 하지 않고도 매우 효과적으로 사유를 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이 심리적 안정을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시가 대단히 거창하게 치유의 방법이나 삶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치유의 기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가장 진보된 조형 언어와 미학적 감성을 동원해 본인이 경험하고 사유한 현실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관객은 작가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물을 마주하면서도 극단적인 비현실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치유와 효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 중에서도 특히 관객의 사유에 초점을 맞추어 기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전시에 참여하는 현대 미술가들이 목격한 시대에 관한 메시지와 그것을 집약한 결과물들을 찬찬히 따라 걷다 보면 예술과 치유의 본질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위의 전시 소개에서 읽어보듯, 결국 치유라는 것은 익숙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궤적에서 아주 조금 이탈 하는 사소한 방법들이 결국 우리의 뇌와 기분을 새롭게 환기시켜 주며, 그것으로 얻는 소소한 새로운 영감들이 우리에게 치유 효과를 가져다 준다는 내용은 정말이지  내가 매우 깊게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며 즉 전시를 보는 가장 큰 목적과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상처받음이란, 곧 휴식을 필요로 하고 그 휴식을 통해 다시 에너지를 재충전하며 치유의 과정을 얻기 때문에 휴식의 방법은 제 각각 다를지라도 일반적으로 '내가 늘상 머무르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가장 물리적으로 쉽고 빠르게 머리를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라는 휴식을 가장 달콤한 치유의 방법으로써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행'은 상황에 따라 많은 시간적 여유와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종종 쉽게 얻을 수 있는 휴식의 수단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것에 대한 무료함과 지루함, 스트레스 같은 감정들을 오래 잘 견뎌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익숙함이 편안하고 낯선 변화가 어쩌면 불편하거나 스트레스인사람) 똑같은 반복의 연속을 쉽게 지루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따분한 일상에 대한 스트레스를 더욱 예민하게 받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더 자주, 여러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여 소소한 치유의 시간을 자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즉 다양하고 창의적인 치유의 경험을 원하며 갈구하는, 조금은 'picky'한 부류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오감의 자극을 느낄줄 아는 섬세하고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관람' 이야 말로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정신적 리프레쉬를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고 수단이며 결국 이것은 예술 전시를 관람하는 주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일상속에서 쉽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들에 대해 깊은 사유를 시도 해본다는 것 자체가 개인에게 직, 간접적으로 새로운 영감을 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좋은 치유의 수단인 것이다. 이 전시가 바라는, 관람자들이 함께 전시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는 목적에 부합하듯이 나 역시도 미술 관람, 예술 관람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치유와 더불어 신선한 감각을 느껴보고자 하는 나의 본능적인 움직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전시처럼 이렇게 인간의 본질적인 감각을 두드리고 자극하는 주제들은 언제나 내게 호기심과 영감을 안겨다 준다. 

 
 
 

작가소개 및 작품설명

https://kunst1.co.kr/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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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예약 :: 치유의 기술

58만명의 관람객이 경험한 <완전한 세상>, <수퍼 네이처>를 넘어설 '뮤지엄 원'의 세 번째 전시 <치유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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