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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이야기/공상과 고찰 그 사이

비전공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우울한 생각.

by Fancy_sailor 2020. 7. 9.

 

 

 

조금은 진지하고 아픈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이런 말을 하기 앞서 일단 나를 한껏 폄하해서 소개하자면 필드에서 그리 대단한 경력도, 이력도 없는 어쩌면 3류 디자이너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줄 곧 쇼핑몰에서 일한 경력들만 가지고 있고 그 마저도 장기 근무 보다도 몇개월씩의 짧은 근무 경력을 다수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전 면접을 보면서 다소 당황스러운 또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서울에 올라오고 바로 열 몇군데 한번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약 2~3군데에서 면접 연락이 왔다. 나름대로 회사 체계를 갖춘 쇼핑몰이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면접에 임하러 갔는데 1차 면접 합격 이후로 2차 면접 통보가 왔다. 사실 1차 면접 때 실기 테스트가 있었는데 전혀 익숙치 않은 mac을 쓰느라고 원래 하던 만큼의 기량을 내지 못해서 아예 맘을 비워두고 있던 찰나에 2차 면접 연락이 와서 다소 의외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2차 면접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생각했던것 외로 아니, 사실은 아예 생각치도 못했던 나름의 심층면접이 이뤄져서 당황해버렸고 무슨말을 해야 될 지 몰랐다. 질문은 사실 어쩌면 별 것 아니었다. "요즘 쇼핑몰 상세페이지 트렌드가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에 굉장히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한 심플한 답변을 내놨고 결과는 어쨌든 불합격 이었다.

 

내가 당황스럽고 신기한 경험이라고 얘기한 것은 그간 제대로 '디자이너' 취급 받지 못하고 일했던 많은 아니, 대부분의 회사들에 머물러 있다가 처음으로 '디자이너'로써 당연히 받아 볼 수 있는 질문을 받은 것이 내게는 처음이었고 그것은 갑작스레 내 뇌의 사고회로 정지를 일으킬만한 일이었다.

 

처음 입사해서 일했던 쇼핑몰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디자인의 질 보다는 양으로 승부거는 곳이었다보니 야근이 엄청났었고 심지어 입사지원시 제출했던 내 포트폴리오는 구경도 하지 않고 내가 채용됐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때는 허무감이 엄청나게 밀려왔다. 물론 빼어난 재능으로 이 모든 역경을 잘 헤쳐나가고 있는 능력자 '비전공' 디자이너분들께는 마땅히 박수쳐 줄만한 대단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비전공 디자이너들이 쉽게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회사의 환경.

 

생각보다 꽤 보수적이라는 디자인 업계에서 '진짜' 디자인 회사에 명함을 내밀기에는 '비전공'이라는 나름의 핸디캡을 갖고 뚫기에는 흔한 '웹 에이전시' 문도 나는 두들겨보지 못했다. 물론 내 포트폴리오의 퀄리티가 매우 떨어졌을 확률도 크다. 단순 비전공 이라는 이유에 모든 변명을 덮어씌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에이전시에서는 "쇼핑몰 경력은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말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에 못이겨 처음 쇼핑몰에 입사했을 때는 한동안 무기력감과 허무함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입사한 곳이니 열심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출근을 시작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포함해, '디자이너' 취급 받지 못하는 불쌍한 '웹 디자이너' 동료 직원들은 하나 둘, 지쳐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문제는 이러했다. 웹디자이너가 어떤 작업물을 만들었을 때, 사장님으로부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게 되더라도 그 작업물에서 약간의 수정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장님의 '매우 주관에 치우진' 감각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완전히 다른 작업으로 싹 갈아엎기 일쑤였다. 심지어 그 당시 쇼핑몰 사장님은 디자인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고 누가봐도 어설프고 촌스러운 디자인일지라도 사장님이 원하는대로, 그녀가  코칭하는대로 그냥 ok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디자이너들은 사기를 잃어가고 디자인에 대한 의지라고는 바닥을 기어갔다. 어차피 모든건 사장님의 변덕스러운 감각과 만족에 온전히 의지해야 되기 때문에, 결국 돈을 벌기위해 그저 그녀의 '로봇'이 되는것에 적응해야만 했던 것이다. 

 

 

 

 

 

일러스트 출처 : http://jooheeyoon.com/index.html '주희윤'작가 일러스트

 

 

 

 

안타깝게도 그런 경험은 그 회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러번 그런 회사들을 다수 경험해야 했고 내 직업적 정체성과 자존감도 거의 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쯤되니 더이상 '디자인'이라는 일에 대한 기대가 모두 사라지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니 이렇게라도 하겠다. 라는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디자이너'가 아니라 '로봇'에 더욱 자발적으로 완전히 적응이 되었던 것은 내가 일했던 지난 회사들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큰 부분 차지하지만 물론 이 같은 상황에도 역경을 잘 뚫고 나간 능력있는 디자이너가 분명 존재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확실한건 나는 멘탈이 그리 강하지 못했고 쉽게 무너졌다.  어쨌든 그런 막연한 마음 상태로 갑자기 '디자이너'로써 마땅히 받을 만한 진짜 질문을 받게됐고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는데 아마 그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로봇'이 아닌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을 깊숙한 곳에서부터 끄집어 오는데 꽤 오랜시간 버퍼링이 걸렸고 결국 흐지부지하다 애매한 답변만 늘어놓게 된 것이다.

 

어쨌든 왠지 모르게 그간 일했던 곳들이 파노라마처럼 주-욱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고 그 기분은 매우 오묘하고 씁쓸하고 공허했다. 이제야 처음으로 '디자이너'로써의 대우를 받아 본 느낌이었고 정작 그런 순간엔 이미 내 직업적 정체성은 많이 도태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은 꽤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고 낡고 녹슨지 오래였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했을 뿐이었다.

 

결론은 어떤 말이 하고싶어서 이 장황한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조금은 무기력하고 힘들었을 나 자신에게 일말의 위로라도 스스로 건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이런 정체성을 혼란을 겪어야 할까. 언제까지 방황하고 갈등하는 걸까. 그 기약없는 감정의 늪에서 나는 어떻게 이겨내고 견뎌야 하는걸까 라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가득 던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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