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 : The giver > 

미래 사회주의 세상을 구현한 SF 영화

 

 

더 기버 : 기억전달자 The Giver , 2014 제작

요약미국 드라마 외 2014.08.20 개봉 12세이상 관람가 97분 감독 필립 노이스 출연 브렌튼 스웨이츠테일러 스위프트제프 브리지스메릴 스트립  더보기 줄거리완벽한 세상을 위한 완벽한 비밀 제거된 ‘기억’을 가진 단 한 사람 전쟁.. 더보기 누적관객수107,567 명 (2014.09.23,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역대 영화 순위 홈페이지 www.facebook.com/2014.thegiver

 

 

 

요즘들어 내가 가장 추천하고싶은 영화이다. 종종 이 영화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왠지 모르게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고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포스팅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긴 고민 없이 바로 써 내려간 제목이 바로 "미래 사회주의 세상을 구현한 SF영화"이다. 말 그대로 영화 속 세상은 고도로 발달한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만 지금과 큰 다른 점이 있다면 극도로 '통제'된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느낌의 포스터와는 사뭇 다르게 영화는 밋밋한 흑백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똑같이 생긴 집, 똑같은 옷, 똑같은 생활 패턴,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게 균등하고 똑같은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적정한 나이가 되면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이냐 하는 문제도 개인의 선택 영역이 아니라 지도자의 지시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배정' 받게 된다. 저 세계의 지도자 수석 원로의 말에 따르면 질투도, 욕심도 없는 평화롭고 균등한 인간 사회를 위해 가장 최적의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그녀는 바로 이 세상을 '커뮤니티'라고 부른다. 아무튼 눈치가 빠르다면 벌써 느꼈겠지만 우리는 이런 세상을 보고 어쩌면 '공산주의'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을 그린 SF영화 라고 간단히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조너스'와 친구들은 직위수여식에서 직업을 배정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고, 그들 또래 커뮤니티 멤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자신에게 배정될 직위가 발표되길 기다린다. 조너스의 오랜 친구 '피오나'와 '애셔'는 각각 보육사와 무인항공기 조종사 라는 직책을 부여받게 되지만 어찌된 일인지 조너스의 발표 차례가 되었지만 수석 원로는 그를 호명하지 않은채로 그냥 넘어가버린다. 모두가 의아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가장 마지막으로 조너스가 부여받을 직책을 드디어 호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차기 기억보유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너스는 직책을 부여받는 것 대신 '선택' 되었다 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조너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예민한 영감을 타고났으며 그외 지능, 정직, 용기 이 모든 면들을 아울러 봤을 때 '기억보유자'로써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기억보유자'는 이 영화에서 바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글쎄, 그래서 그게 도대체 뭐하는 직업이지? 라고 모두가 궁금증을 갖고 있는 가운데 조나스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게되고 이 커뮤니티 소통 방법으로 말하자면 그는 출근이 아니라 첫 훈련을 하게 된 셈이다. 독특한것은 이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단어 또한 제한되어 있어서 쓸 수 있는 단어,  쓸 수 없는 단어가 구분되어 있는데 예를들면 말버릇처럼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라는 말을 쓰는가 하면 '사랑'과  같은 단어는 이미 옛날에 사라져버린 단어로써 더이상 쓸 수 없도록 되어있고 거짓말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무색무취한 아우라 뿜뿜 풍기는 이 커뮤니티에서 한 줄기 희망, 한 줄기 색깔을 불어 넣어주는 큰 역할이 바로 '기억전달자'라고 할 수 있다.

 

 

 

 

 

조나스는 기억전달자 스승을 만나 하루하루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게된다. 그 트레이닝은 바로 이 회색빛 커뮤니티 사회 이전의 찬란했던 인간세상의 기억을 스승으로부터 전달 받는 것 그 뿐이다. 그것이 트레이닝의 전부이지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철저한 비밀유지가 되어야 하며 조나스가 받는 훈련에 대해 함부로 누군가에게 발설하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게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단 한가지 특권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나스에게만 '거짓말'이 허용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조나스가 첫번째 훈련날 스승으로부터 전달 받은 과거 세상의 비밀은 바로 '눈'이었다. 기후 통제로 '여름'과 '겨울'이 사라지고 회색빛이 감도는 이 커뮤니티 사회에서 평생을 자란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차가운 눈'을 보고 느끼게 되었고 조나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두번째 수업에는 '고통'과 '색깔'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는 좀 더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비밀들을 전달 받기 위해 한껏 기대하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조나스가 기억해야 할 이전 세상의 모습은 모두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조나스는 스승으로부터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들까지도 천천히 조금씩 전달 받게되고 한동안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빨강, 초록, 파랑 수많은 색이 있지. 우리들은 다 없애는 쪽을 선택했어.

색깔, 인종, 종교 모두를 똑같게 만들었지. 달랐다면 시기하고 화내거나 억울해하고

증오에 사로잡힐 수 있어서 '늘 같음' 상태로 통일 시켰다."

 

 

 

기억전달자는 조나스에게 색깔의 기억을 전달하면서 위와 같이 설명했다. 그리고 조나스는 하나 둘, 이 커뮤니티 세상의 지나친 통제로인한 불합리들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다시 이전 세상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커뮤니티 세상을 대상으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콧잔등이 시큰해 지는 순간을 몇번이나 느꼈는지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생겨난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 가치와 소중함에 대해 새삼스럽게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배경지식이 여러모로 딸리므로 좀 더 수준 높은 철학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멋드러진 글은 쓸 수 없지만 서로 다름의 아름다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로운 세상이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있는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속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서로의 차이와 다름들, 그것이 분쟁과 경쟁, 시기, 질투가 되지 않도록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개인과 집단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장해야 되는 책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고 그 마음 안에는 인류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과 '열정'을 함께 담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면서 단 한번도, 그 언젠가 내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싸워야 할 날이 올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지금의 '자유'가 우리에게 당연하듯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피와 땀과 희생으로 겨우 쟁취할 수 있었던 값진 것이라는걸 알 수 있듯 지금도 어디선가 세상을 통제하고 휘두르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으며 우리가 스스로 개인의 인권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언제라도 박탈 당할 수 있다는걸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아니 요즘 들어 더욱 그런 경각심을 느끼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문득 이 영화가 왜인지 자꾸만 떠올랐고 그저 사람들이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용기있는 투쟁을 절대 두려워 하고 회피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책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혼자있는 시간의 힘> 

by 사이토 다카시 

 

 

 

벌써 코로나 시대 3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길어질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 과정에서 백신접종, 백신패스 등등 코로나로 인한 새로운 정책들이 많이 시행됐는데 그 정책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또 한편으로 반대하는 소수 집단들도 존재한다. 어쨌든 이 책은 그 소수집단(?)에 소속이 되어 의도치않게 혼자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나를 위해서 친한 동생이 생일 선물로 보내준 책이었는데, 지금같은 코로나 시대에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혼자 있는 시간을 유연하게 보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위로나 지침서가 되어줄만한 책일까? 라는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대했던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내가 고작 이 책 한권으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 파악할 순 없겠지만 책의 초반부를 읽는 내내 '고독'의 시간을 건강하게 잘 보내는 방법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이 '나르시즘'적인 감성에 심취하여 자신의 수준은 높이 사지만 타인의 수준은 깎아내리며 배척하고 쉽게 어울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런식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버텨내며 자신에게만 시간을 투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공에 바람직한 방법인 마냥, 마치 성공한 아웃사이더가 외톨이 였던 시간들을 부정하고 그것이 대단한 '멋' 이라도 되는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진짜 성장은 혼자 있을 때 가능하고 최소 무언가를 학습하는경우에도 스스로 공부하고 이루는 것이지, 누군가 알려주고 가르쳐줄 순 있지만 결국 그 누구도 대신 해 줄순 없는 것 처럼 말이다.  근데 저자가 초반부에 얘기한 고독한 시간은 뭔가 스스로에 대한 선민의식에  비롯된 생각이 많아 보였고 그런 방식의 타인과 거리둠은 그다지 긍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작가는 '자기력'이라는 단어를 얘기했는데,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힘 그것을 자기력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작가는 어린 시절 "나는 이대로 끝날  사람이 아니야.","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라는 생각으로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하지만 남을 미워하거나 혐오하진 않았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묻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거만함으로 분출되고 있었고 물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다고 본인도 말하지만 그런 기분이 뭔지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역시 작가의 강한 나르시즘이 느껴졌다. 내가 기대한 책의 내용은 타인과 단절하고 '고립된' 시간을 잘 보내기 따위가 아니라, 타인과 잘 소통하면서도 내게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기 같은 얘기들을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다보면 마치 집단에 잘 소속되고 대인관계를 잘 하는 사람들은 개인이 추구하는 성공이나 혹은 사회적 성공을 이뤄내기 어려운 것 처럼 단언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이 꽤나 나를 불편하게 했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높은 단독자는 담합으로 자신의 입찰 가격을 낮게 책정하지 않는다."

"높은 기대치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기력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힘은 '젊음'이라고 생각한다."

 


 

 

위 내용은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 마라' 라는 챕터에서 발췌해온 글이며, '담합'을 나 자신에 대한 '입찰' 가격을 낮게 설정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 하는 것 부터가 저자의 '오만함'을 느낄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마라. 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모두에게 사랑 받으려고 너무 피곤할 정도로 애쓰지마라. 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뜻은 담합을 함으로써 자신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짓을 하지 마라. 뭐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도대체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라는 의문만 남는 책이다.  뭐가됐든 작가는 그런 자기도취 스러운 오만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자기 성장의 주축 에너지 였던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았다. '자부심'과 '자만심'은 한 끗 차이인것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좋지만 그 저변에는 타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깔린 것이라면 과연 그것을 긍정적인 에너지라고 볼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잘 모 르겠다. 

 

그리고 그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 3가지를 말했는데 1.눈앞의 일에 집중한다 / 2.원서를 읽거나 번역을 해본다 / 3.독서에 몰입한다. 이 세가지중 3번째 독서에 몰입한다 부분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주로 고전 소설이나 철학도서들을 즐겨 읽었는데 니체를 읽으면서 정신적 멘토로 삼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고 그들도 본인에게 호의적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내용이 나왔다.

 

 


 

"나는 책이 마음에 들면 '내가 책(그들)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나를 이야기 상대로 아주 흡족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분명 대화를 나누면 즐거웠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앞서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자아도취성 발언에 또 한번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돌아가신 니체는 아무런 생각도, 이 책의 독자가 누군지 따위도 알지 못했을텐데 그들에게 자신이 선택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말에 조금은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무튼 이 나르시즘 충만한 내용이 책의 초반부 부터 등장했고 겨우 몇 십 페이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미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선물받은 책이기도 해서 끈기를 갖고 좀 더 읽어 보았다. 결론적으로 혼자있는 고독한 시간을 유용하게 잘 활용한 여러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 어떻게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뜻깊게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 책의 거의 끝 부분에는 외로움, 고독과 싸워 이겨내는 주제의 소설책 여러권을 서너 줄 넘짓한 짧은 글로 추천하는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냥 좀 담백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는지에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러면서도 쉽게 우울에 빠지거나 고립되지 않는, 건강한 밸런스 맞추기에 대한 얘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나 작가의 '자기애' 충만한 사상이 은근슬쩍 내포된 책일거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고 혹시나 이 책 역시도 그가 스스로 얼마나 수준이 높고 교양이 있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나는 나의 고독한 시간을 이렇게 우아하게 잘 보냈다 라는 자기 자랑질을 목적으로 출간한 책은 아닐까 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본다. 

 

 

 

 

 

1월 2일부터 현대미술관을 다녀왔었다. 물론 전시를 보기위해서.. 그러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이제서야 포스팅을 올린다. 2022년의 첫 전시회 방문이었고 안타깝게도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방역패스가 실시중이라 전시회도 예외없이 방역패스를 적용중이었고 (물론 지금은 카페, 식당을 제외한 영화관, 전시회 등등은 방역패스가 해지되었다.) 미접종자인 나는 pcr 검사를 통해 음성 확인증을 문자로 발급 받고서 찾아갈 수 있었다. 이 포스팅은 <경이로운 전환>과 <그 후, 그 뒤>  이 두 전시에 대한 나의 기록이다.

 

 

 

 

<경이로운 전환 :  The phenomenal Transition>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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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 가상화폐, 부동산에 대한 뉴스들이 폭발하고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 노동현장에서의 사고들이 연일 보도되며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시대적 현상들 간의 공백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경이로운 전환》은 돈이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노동 없는 소득이 생긴다는 믿음이 상승하는 것에 반해 점차 아래로 꺼지는 인간노동과 그러한 노동력을 발휘하는 노동자의 재등장에서 감지되는 현실 세계의 작동원리를 우리 시대의 주요한 운동성으로 주목한다. 이 전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의 반복적인 운동성에 대해 서술하는 13점의 작품을 상호 연결하여 우리 시대의 현실 이해에 재도달하고자 한다.

 

  우리 시대에 소득을 얻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동자가 되어 임금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노동하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임금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 사용권을 넘겨줌으로써 받게 된다. 그에 반해 불로소득은 그 노동력의 사용자로서 얻게 되는 자본가의 소득이다. 자본가는 자신이 투입한 것들, 예를 들면 기계. 땅, 건물 등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빈 공장이나 작동하지 않는 기계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이윤은 노동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불로소득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노동력 혹은 타인의 노동소득을 그 원천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자본가가 투입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이 회수되면서 생기는 불로소득은 그 관계 안에서 다시 자본이 된다. 자본이 된 돈은 이처럼 태생적으로 타인의 노동력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한편 자본의 투입과 회수는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생산되고 판매되어 이윤, 즉 돈으로 돌아오려면 그 사이사이에 시간적·공간적 공백이 필요하다. 이 공백을 이어주는 것은 상업 어음, 담보, 대부 등의 신용거래이다. 자본가는 당장 돈이 없더라도 신용을 통해 이러한 가공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다. 가공의 자본은 애초부터 노동자와의 관계 안에서 생산한(할) 상품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계의 반복이 상품을 돈으로, 돈을 자본으로 만들어주고, 자본은 무한 증식할 수 있게 한다. 상품에서 돈으로, 돈에서 자본으로의 무차별한 교환관계와 이동 속에서 인간 노동력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그것이 자본의 기원이라는 사실은 잊혀 진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을 통해 자본이 된 돈은 산업자본가를 거쳐 상업자본가, 대부자본가, 지주 등에게 분할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력 대신 기계, 주식, 땅, 건물 그리고 화폐가 그 가치를 낳은 것으로 오인된다. 여기에서 ‘놀랍고도 신비로운’ 믿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허상이지만 가상-현실로서 우리 시대를 이끄는 주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전세계적인 감염병의 도래와 그로 인한 격리와 봉쇄 속에서 자본의 투입과 이윤 회수 사이의 공백은 더 커지고 이 공백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자본을 끌어오는 방식의 반복으로부터 자본은 끊임없이 자본이 되어 간다. 그럴수록 이와 맞물려 있는 노동력 또한 위기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노동 혹은 노동소득의 끊임없는 가치 하락이다. 감염병으로 인해 다양한 위기에 대한 인식이 커지는 가운데 전방위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환의 시도들이 목격되지만, 전지구적으로 맞이한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은 자본 축적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증식이 불러온 모순과 그로 인한 인간의 위기이다.

 

  이 전시는 결국 노동력의 가치 하락이라는 위기가 이윤 창출을 통한 자본 축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내재된 운동 법칙임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우리 시대는 자본의 축적과 확장을 통해 체제가 유지되는 사회다. 자본주의의 자기혁명을 위한 운동이 마치 인간과 사회를 위한 필연적인 ‘선(善)’인 것처럼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진리일 수 없다. 그 증거는 우리 사회에 나타난 수많은 증상들을 통해 감지되고 있다. 이 운동성을 놀랍고도 신비로운 것, 나아가 기괴하고 불쾌한 것으로 읽어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전환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 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서문에서 읽었듯,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시장 경제가 하락하다시피 하고 그로인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서 이 사회적인 격리와 봉쇄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흘러가고 있는 시장 흐름의 변화와 모습들을 관찰하고 조명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작품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노동력이 급 하락하고 있는 현 시점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가 강조하고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자본의 기원'이라 불리는 인간 노동력의 가치를 밝히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시서문 일부 발췌 요약>

 

 

"자본가는 자신이 투입한 것들, 예를 들면 기계. 땅, 건물 등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빈 공장이나 작동하지 않는 기계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이윤은 노동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상품에서 돈으로, 돈에서 자본으로의 무차별한 교환관계와 이동 속에서 인간 노동력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그것이 자본의 기원이라는 사실은 잊혀 진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을 통해 자본이 된 돈은 산업자본가를 거쳐 상업자본가, 대부자본가, 지주 등에게 분할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력 대신 기계, 주식, 땅, 건물 그리고 화폐가 그 가치를 낳은 것으로 오인된다."

 

 

"전세계적인 감염병의 도래와 그로 인한 격리와 봉쇄 속에서 자본의 투입과 이윤 회수 사이의 공백은 더 커지고 이 공백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자본을 끌어오는 방식의 반복으로부터 자본은 끊임없이 자본이 되어 간다. 그럴수록 이와 맞물려 있는 노동력 또한 위기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노동 혹은 노동소득의 끊임없는 가치 하락이다."

 

 

"이 전시는 결국 노동력의 가치 하락이라는 위기가 이윤 창출을 통한 자본 축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내재된 운동 법칙임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

 

 

 

A working History LU Chieh-Te : 직업의 이력, 루치에테

 

 

 

여기는 "직업의 이력 - 루치에테" 라는 책을 한데 모아서 전시중이었는데 '루치에테'라는 한 인물의 인생에 걸친 직업의 변화에 대해서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 책이었다. 많은 직업의 변화와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아온 그의 이야기는 사실상 자서전이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였는데 어린시절 농사를 지었던 경험부터, 공장, 호텔 등등 나아가서 투자를 하기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그의 노동의 변화는 '노동과 노동력'을 주제로 얘기하는 이 전시 기획과 아주 잘 어울리는,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미술작가인 '저우위정'씨는 이 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생동감 넘치는 직업적 이력을 써 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달간의 인터뷰를 필요로 했고 이상적으로 생각한 대상은 바로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중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3일동안 신문으로 구인광고 낸 뒤,  많은 후보자들 끝에 '루치에테'씨가 가장 이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결정을 짓고 그의 인생을 인터뷰 하면서 하나의 '책'으로 엮게 되었고 바로 그 책이 이 전시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 

 

이 책을 다 읽어보면서 느낀 부분은, 그가 노동력의 아주 아주 가장 기초의 단계에서 현재에 오기까지 얼마나 길고 오랜 시간을 노동에 쏟아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을 다 부었다고 해도, 아니 그의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노동의 가장 기초가 되는 '노동자'에서부터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시장 경제에 존재하는 모든 노동의 단계들을 하나 하나 다 밟아 온 과정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의 인생이 곧 노동이었고, 그 노동력의 가치와 결과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파란만장하고도 화려한 이력서와 같다.

 

그는 여러 직업을 거쳐 오면서 오랜 시간을 '노동자'로써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모습은 시장 경제에서 봤을 때 아주 정직하고 성실한 방식으로 천천히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어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년이 된 지금으로써 그의 인생은 젊었을 때시절 보다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당연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쉽고 빠르게 '자본가'의 단계에 이르를 수 있을까. 이 부분을 늘 요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성실하게 살아온 인생과 숭고한 노력들을 보면서, 마치 불로소득만이 큰 시장을 형성하고 돈을 번다는 무의식적인 착각이 아니라, 그 밑으로는 노동의 기초가 되는 '노동자'들의 신성한 땀이 있기에 동시에 '자본'이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을.. 필히 자각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이야기:

 

"오늘날 음식을 비롯한 여타 제품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현 환경적 가치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요소를 마련해야 한다. 이 작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물은 매개로, 안료는 오염원으로 작용한다. 이 두 물질이 섞이면 하수가 된다. 그러면 하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모방하고, 오염물질은 남겨져 종이 위에 침착된다. 하수구에 가까워질수록 오염이 더욱 두드러지듯, 이러한 반복적인 움직임의 결과로 종이는 색종이로 물들어 간다. 이 작품은 환경오염 과정을 모티브로 삼은 혁신적 제작 방식을 보여준다. 

 

 

 

 

눈물이야기:

 

"가게를 창업하려면 유동인구가 많은 상권을 물색해야 한다. 사람이 가장 가치있는 자본이라는 말처럼, 투자를 할 때는 고가의 임대료를 지불하더라도 그 이상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고객이 실질적인 자본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고 가능한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손님은 줄었으나 임대료는 조금도 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건물주가 최고의 투자임을 알게 된다."

 

 

 

 

 

땀이야기:

 

"하던 일이 자동화 기계로 대체되면서, 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직업을 찾아다녔다. 배달업은 그리 어렵지 않을뿐더러, 기계가 거리를 활보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배달앱으로 주문을 받고 내비게이션을 따라 오토바이로 상품을 받아서 다시 내비게이션을 따라 지정 주소로 배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배달에 필요한 기술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또한 기계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내 몸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후, 그 뒤>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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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란 있는가. 현재, 우리는 다음 세대의 미래를 담보로 하는 기후 비상 상황에 살고 있다. 진단은 분명하지만 해결책은 아직 불확실하다. 인간의 한정된 예측을 초월하는 징후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를 의식한다. 과연 이대로의 삶을 그대로 지속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시 《그 후, 그 뒤,》는 현재의 양상이 계속 지속된다는 가정 하에 ‘그날’로 설정된 근 미래를 발굴하는 일종의 우화이자 대화이다. 반성적 시나리오로부터 출발해 보건대 과연 무엇이 남아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바다로 흘러들어온 예후적인 현상을 추적하고 미래의 흔적을 통해 그 이후의 모습을 끌어당겨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추측하는 그런 방식으로 ‘다음’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를 재조정 할 수 있는 대안적 열망 가운데 상이한 잠재성들을 인식하고 재구성하여 도달할 ‘다음’을 감지해 본다. 작품들은 장차 다가올 미래의 이미지라기보다 어쩌면 허구적 역사로서, 익숙한 세상에서 무엇이 이상한지 포착하도록 현재를 반영하고 경험케 한다.

 

 

환경과 기후 문제를 다뤘던 전시로, 악화된 환경으로 인해 파괴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 낸 전시였고 그것은 일종의 '우화'이자 '대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과연 무엇이 남아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라는 출발점에 서서 파괴된 환경과 또 그 파괴된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적응해 나가려는 놀라운 생물체들의 생존 번식을 함께 결합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함께 생존하는, 절대 '상생'이 아니라 그저 파괴된 환경에서조차 어떻게든 적응하여 번식하려는 생명체들을 다소 기괴한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오브제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앞선 전시와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현상과 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애정어린 관심과 깊은 고찰을 통해서 탄생한 작품들이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쓰레기 더미들에 붙어 기생하여 번식하는 생물체들의 '진화된' 모습들을 상상하게 하는 많은 전시 오브제들. 그 중 익숙하게 낯익은 물건들이 몇몇 눈에 띈다. 아이스크림 뚜껑이라던지 낡은 신발 등등 쓰레기들로 초토화되고 더렵혀진 최악의 환경 안에서도 어떻게든 생존 하기 위한 생물체들의 처참한 몸부림과 같은 모습들, 과연 그것을 '진화된 모습'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 마저도 진화된 형태라면 진화라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과연 이래서 이 전시를 '우화'라고 칭했을지도 모르겠다. 

 

 

 

 


 

"<보라>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애도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을 하기보다 잠재적 변화와 저항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로써 수세기 동안의 인간 행위가 자연 순환 과정을 결정하게 될 정도로 커지면서 기후 변화에 동인이 되었음을 생생하게 목도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애도하는 20분 가량의 영상. 10개국에서 촬영하고 수백시간 기록된 장면들을 6개의 스크린으로 엮어낸 전시다. 전시 설명은 '종말론적인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글쎄 화면에서 그리는 수세기를 거쳐 흐르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종말론적 의미를 상상하게끔 만드는 무거운 아우라가 전해진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앞으로 계속해서 환경이 파괴된다면 '지구종말'이라는 예언은 더이상 예언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을 누구나 예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가 이미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예측, 상상하며 미리 '애도'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지 않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나 지구에 종말이 찾아왔을 때, 그때는 이미  '애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 전에 '지구종말'을 상상하며 미리 지구를 애도하겠다는 예술가들의 섬세한 마음..... 이것은 과연 애도인가 선견지명인것인가.

 

 


 

 

참 아이러니하게도 심각한 기후 변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오면서 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순간의 광경이 지구의 건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라 할 순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꽤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망해버린(?) 지구를 상상하며 이 행성을 애도 했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프레셔스 Precious , 2009 제작

요약미국 드라마 2013.01.10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110분감독 리 다니엘스 출연 가보리 시디베모니크폴라 패튼머라이어 캐리  더보기 줄거리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이 세상의 모든 소중한 소녀들을 위한 .. 더보기

 

 

 

여기 누구보다도 절망속에서 살아가는 어린 소녀가 있다. '프레셔스'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소녀이지만 그녀의 현실은 사실 누구보다도 비참하고 처참하다. 이제 고작 16살인 프레셔스는 심각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해오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녀는 벌써 2번째 임신에 이르게 되고 그런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를 '질투'의 대상으로 여기며 프레셔스를 더욱 모질게 질타하고 괴롭힐 뿐이다. 

 

프레셔스의 두번째 임신을 알게 된 학교 선생님은 심각성을 깨닫고 그녀에게 학교로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했지만 프레셔스는 선생님의 부탁을 완강히 거절한다. 결국 선생님이 직접 프레셔스의 집에 불시로 방문하게 되는데, 다름아닌 그녀에게 '대안학교'를 소개해주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절대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엄마의 완강한 지시에 프레셔스는 선생님을 문전박대하게되고, 선생님은 어쩔수없이 프레셔스에게 대안학교의 이름과 주소만 알려주고 자리를 떠난다.

 

사실 프레셔스의 엄마는 프레셔스가 친아빠 즉 자신의 남편과의 관계로 낳은 첫째 아이를 빌미로 일을 하지 않으며 매달 복지금을 받으며 살아가고있다. 평소 그녀는 프레셔스에게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갔다는 질투심에 불타올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프레셔스가 낳은 아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편익을 추구하는 그런 엄마인 것이다.

 

 

 

 

 

가장 극 빈곤층에 사는 사춘기 흑인 여자 아이, 가정 내 성폭력, 엄마의 외면,  미혼모의 삶 등등 이제 겨우 16살인 그녀를 표현하는 수식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세상의 폭력과 어둠으로 물들어있다. 이 영화에서 중간중간 희비를 극명하게 엇갈리도록 표현하는 연출이 자주 등장했는데, 프레셔스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머릿속으로는 스스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들이다. 그녀의 상상은 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옷과 메이크업으로 잔뜩 꾸민채로 그들을 향해 인사하고 사인을 해준다. 마치 헐리우드 스타들처럼. 말 그대로 Fancy한 분위기와 아웃핏으로 중무장한 화려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많은 한줄 리뷰 중에, 마치 서양판 '혐오스런 마츠코'를 보는 것 같았다 라는 누군가의 말에 꽤나 공감이 됐다. 하지만 마츠코는 365일 온통 머릿속을 꽃밭으로 꾸며넣기에 집중했다면 프레셔스는 짧은 상상에 그칠 뿐 그녀는 금새 어두운 현실로 돌아온다. 차이점이라면 마츠코는 우울한 현실을 영원히 밝은 얼굴로 포장하며 '회피'했던 식이었고 프레셔스는 상상에서 깨어나 늘 어두운 현실을 맞닥드린다는 부분이 아닐까.

 

 

 

 

 

그런 프레셔스에게도 어느날 변화는 찾아온다. 바로 그녀가 대안학교의 '레인'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프레셔스는 레인 선생님의 레즈비언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그녀가 임시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곳에서 머물면서 프레셔스가 했던 생각, 대사들이 기억에 남았다.

 


 

 

"Why poeples that barely know me should be nicer to me than my mother and my father?"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엄마 아빠보다 나에게 더 친절할까"

 

"I felt warm"

 "따뜻함이 느껴졌다"

 

"Momma say homos is bad peoples. but momma, homos not ones who raped me."

"엄마는 호모가 나쁘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 호모는 나를 강간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Homos not ones who let me sit in class, all them years and never learn nothing."

"The homos not ones who sell crack to peoples in Harlem."

호모는 나를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상태로 몇년이고 마냥 앉혀두지 않고

호모가 할렘에서 마약을 파는 것도 아니에요. 

 

"Love ain't done nothing for me. love beat me, raped me, called me and animal. make me feel worthless.

make me sick."

사랑은 나한테 아무것도 해준게 없어요. 사랑은 나를 때리고 강간하고 나를 동물 다루듯 했어요. 나를 쓸모 없게 느끼도록 했고

날 아프게 했어요.

 

 


 

프레셔스에게 사랑은 폭력이었고 강간이었고 동물과 같은 취급을 당한 것, 그것이 그녀가 받아온 사랑이었다. 프레셔스의 말에 레인 선생님은 곧바로 That wasn't love.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이라고 대답했지만 그녀가 겪고 배운 사랑의 모습은 폭력 그 자체였고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사랑은 프레셔스에게는 어쩌면 '거짓'이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프레셔스가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현실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방향으로 그려나간다.  그녀는 매일 같이 반복되던 폭언,  폭행에서 빠져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할 수 있었고 두 아이를 책임지는 어린 미혼모 라는 사회적 수식어를 가지고 그녀는 앞으로 세상과 끊임없이 맞서 싸워 나가야만 한다. 딱히 굉장히 희망적인것도, 그렇다고 막연히 좌절스러운것도 아닌 아주 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며 영화는 마무리 되었다.  프레셔스에게 변화의 전환점이 된 것은 대안 학교를 다니면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됐고 그곳에서 선생님을 만나 정신적 위안을 얻고, 복지사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들과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확실한건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배우지 못하게 했고 그저 앉아서 먹기를 강요했고 학교에 나가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겼던 아동학대범이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못하게 하는것, 일부러 학교를 나가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랄 수 있는 능력을 차단하기 위함이었고 그저 아빠에게 성폭행이나 당하도록 방치하면서 딸이 아이를 낳으면 그 복지금을 몽땅 가로채어 자신의 생활비로 탕진한게 그녀의 어머니가 한 짓이다.

 

 

 

 

 

이렇게 한 사람을 억압하고 통제하기위해서 나쁜 사람들이 종종 하는 하는 행동들은 바로 배우지 못하도록 만들고 사회와 차단되어 고립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자기 손으로 쉽게 좌지우지하며 한 사람을 온전히 조종하고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레셔스는 그 굴레를 벗어날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고 딸을 향한 그녀의 치졸한 질투심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자기 자신의 현실을 모두 프레셔스의 탓으로 돌려버린 이 엄마는 어쨌든간 파국을 맞이했으니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영화  프레셔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는 점이 인상깊은데, 바로 오프라윈프리가 이 영화를 제작하였고 '사파이어'라는 흑인 여성 작가가 자신이 할렘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시절에 직접 보고 마주했던 상황들을 바탕으로 소설을 출간했고 그 소설이 바로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건 이런 일들이 할렘가 같은 극 빈곤층 사회에서는 너무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극한의 상황과 고통속에서 매일매일을 투쟁하고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을 많은 10대 소녀들에게 건투를 빌고싶다. 늘 세상이 그녀들에 편에 서서 있어주기를. 

 

 

 

 

 

 

개요

BORN TO BE FREE is a revelatory investigation by three intrepid free-diving journalists, Gaya, Tanya and Julia, into the global trade in wild sea mammals. Their journey takes us to the most remote corners of Russia and witnesses, for the very first time, the shocking treatment that whales, dolphins and walruses are subjected to and discovers the corruption at the heart of this cruel international business.

 

BORN TO FREE는 가야, 타냐, 줄리아 등 세 명의 대담한 자유 다이빙 언론인이 야생 해양 포유류의 세계 무역에 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그들의 여정은 우리를 러시아의 가장 외딴 구석으로 데려가고 고래, 돌고래, 바다코끼리의 충격적인 처우를 목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잔인한 국제 비즈니스의 핵심에서 부패를 발견하게 됩니다.

 

 


 

 

 

 

2013년 프리 다이버인 가야, 타냐, 줄리아는 포획되어 사라진 18마리의 벨루가의 흔적을 찾아 쫓아간다. 그 과정에서 벨루가를 포획하고 사육하는 처참한 방식들을 목격하게되고 인간의 비즈니스로 인해 잔인하게 학대 당하고 희생되는 벨루가들,  또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부패한 시스템들의 민낯을 파헤치고 고발한다. 한낱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서 그들은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원초적 자유를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BORN TO BE FREE" "자유로워지기 위해 태어나다" 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그들은 그저 자연에서 태어난 순수한 존재들일 뿐인데 말이다.

 

 

 

 

 

국제 프리 다이빙 챔피언쉽의 최초 여성 우승자인 '줄리아'는 종종 백해(러시아유럽권 북부, 바렌츠해로 열려있는 바다)로 나가 벨루가들과 함께 수영을 했었는데 어느날 그녀와 함께 수영을 했던 벨루가 2마리가 결국 돌고래 아쿠아리움으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 연구센터였던 곳은 점점 돌고래 산업의 한 부분이 되어갔고 그들은 새로운 벨루가들을 포획하여 링을 통과하기, 공을 가져오기 등과 같은 묘기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벨루가들과 함께 수영하는 체험을 하기위해서 관광객들은 돈을 지불했고 그렇게 과학연구소는 점점 큰 사업의 장으로 변모해갔다. 

 

러시아에서 세계 각지로 수출되는 벨루가들은 여러 임시 수용소를 거쳐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벨루가들이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결국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살아남게된 벨루가 몇마리만이 아쿠아리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이빙 챔피언쉽의 최초 여성 우승자 '줄리아'의 말에 의하면 벨루가들은 주로 북극해에 서식하는 동물로써 차가운 온도의 물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잘 관리가 되지 않는 임시 수용소의 높은 물 온도로 인해서 벨루가들이 화상을 입거나 또는 피부병을 얻는 등 동물 학대를 의심해볼 수 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과 시스템들이 벨루가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Utrish Marine station에 잡혀있는 벨루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Kim Basinger 라는 배우에 의해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녀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에게 직접 벨루가들을 자연으로 다시 풀어주길 바란다는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이 사건이후, 그녀들은 제일 먼저 Utrish로 가서 벨루가들의 흔적을 쫓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7마리의 벨루가들이 포획되어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촬영한다. 

 

 

 

 

이곳  Utrish의 사육사의 말에 따르면 주로 아직 덜 성장한 어린 벨루가들을 데리고 훈련을 시키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린 벨루가를 교육하고 길들이는 것이 다 큰 성인 벨루가를 길들이는 것 보다 훨씬 쉽기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애초에 흰색을 띄는 성체 벨루가는 통관료도 매우 비싸기 때문에 주로 아직 덜 성숙한 회색빛을 띄는 아기 벨루가들을 잡아서 각국의 아쿠아리움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벨루가가 포획되고부터 임시수용소로 거치는 과정까지 그 통관 현장을 지켜보며 촬영하고 기록을 남겼던 수의사 "Tagiltsev"를 만나 자료를 얻고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앞서도 말했듯이 흰 벨루가의 통관료가 너무 비싸 주로 어린 회색 벨루가들을 포획하며, 그물로 채집하는 과정에서 종종 이미 사망해버린 벨루가가 발견되곤 한다고. 사망한 벨루가의 배를 갈라 부검을 해본 결과, 벨루가의 기관지 쪽에서 물이 흘러나왔고 아마도 예상해보기를, 어린 벨루가가 그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다가 그물망이 목에 걸려 익사된 걸로 보인다는 내용 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이 벨루가 포획을 진두지휘하는 감독관이 염려하는 부분은 오로지 포획 물량을 다 채울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부분 뿐이었다. 그들에게 벨루가 포획은 그저 돈을 벌어야 하는 수단의 일부이며 사업일 뿐이다.

 


 

 

 

 

포획된 아이들은 각국의 아쿠아리움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생태계의 감옥 안에서 살아있는게 아닌, 난생 처음 죽은 물고기 먹는 방법에 익숙해지도록 강요당한다. 그 장면이 너무나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인간들 못지않은 고도의 사회적 동물인 벨루가들은 실제로도 다양한 소리로 의사소통 할 만큼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데,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부모를 포함한 그들의 이모, 삼촌들과 집단을 이루며 사회성을 배우고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어린 벨루가들이 그들 세계의 사회성을 채 배우기도 전에 인간들에게 포획 당하고, 그들의 활동 반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좁은 아쿠아리움에서 인간에게 길들여 지면서 많은 멘탈적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기존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벨루가들에 비해 짧은 생을 살아간다. 얼핏 보기에는 그들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모가 늘 웃고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쿠아리움에서 살아가는 벨루가 고래들이 마치 행복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만, 사실은 크게 고통받고 있음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럼에도 왜, 벨루가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이 시스템은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연방 청사 미국 법원에 출석하던 법률 고문의 말에 의하면 해양포유류보호법의 모든 기준을 적용했다가 다시 번복하게 된 것은 벨루가 고래의 개체군이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도대체 어째서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는가? 라는 물음에 아주 간단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 이유는 멸종위기종 목록에 없기 때문입니다." 

 

 

 

 

 

쥴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This is their world, their life, and we can only come for a visit.  Freedom for modern people lies in seeing themselves as the kings of nature. I think man is not a king. Man is a part of it all. Man has no right to destroy the harmony of this world."

 

"여기는 그들의 세계, 그들의 삶이고, 우리는 오직 방문 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자유는 자신을 자연의 왕으로 보는 데 있습니다. 나는 인간이 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조화를 파괴할 권리가 없습니다."

 

벨루가들의 삶을 파괴하고, 그들을 가족의 품에서 빼앗아 오는 것도 모자라 학대하며, 열악한 환경에 방치하고 그저 훈련시키기를 반복하면서 인간의 산업 수단으로써만 이용하는 이 동물 산업 시스템에 많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과연 이것을 단순히 약육강식의 흐름이며, 또는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인간의 당연한 능력이자 권리, 자연의 섭리라는 뻔뻔한 이름으로 갖다 붙일 수 있을까?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동물 세계의 약육강식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사고'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비롯되는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깊이 있는 생각과 통찰을 하는 인간이라면 자연의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에 있는 '인간'이 가진 지능과 능력을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는 용도로 쓰는 것이 절대로 당연한 권리이자 능력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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