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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협회 아이테르AITHER - 레이어드 시티 : 하마맨션]

아이테르전시 부산 범일동 294-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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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수집하고 해체하다… ‘레이어드 시티:도시 쌓기 프로젝트’ 그룹전”

부산 지역 창작자 팀 ‘하마맨션’이 10월 3일부터 9일까지 아이테르(동구 범일로 65번길 21, 4층)에서 그룹전 ‘레이어드 시티: 도시 쌓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레이어드 시티’는 부산광역시와 부산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전시로, 부산에서 활동하는 청년 예술가 6인이 부산을 수집하고 해체하여 다시 기록하는 아카이빙 프로젝트다. 고혜진, 김청아, 김혜실, 박지형, 서상희, 엄효빈 작가 6인은 ‘기억-연결-가상’이라는 개인의 사유를 통해 기록한 부산을 영상, 사운드, 설치, 3D 그래픽, 퍼포먼스 등으로 구현한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에는 개인 작품 6점과 작가진 1:1 매칭을 통해 각자의 아카이빙을 콜라보하는 공동 작품 3점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시시각각 변하는 부산의 흐름을 아카이브한 후, 로컬 작가들의 시각으로 확장하여 부산에 대한 공간 재해석 및 새로운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기획됐다. 해당 전시는 10월 3일, 8~9일 오후 3시에 예약자에 한해서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레이어드 시티’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layered_city)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전시는 평일 오후 12시부터 오후 8시까지, 주말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전시 기간에 휴무 없이 무료로 관람 할 수 있다. 관람객들이 직접 레이어를 선택하여 각자의 도록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굿즈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한다.




레이어드 시티. 층을 이룬 도시다. 팜플렛에는 6인의 예술가들이 부산을 수집하고 해체하며 다시 기록하는 아카이빙 프로젝트라고 소개하고 있다. 각 작품들은 작가 개개인의 시각과 개성으로 부산의 모습을 채취하고 그것들을 다시 재 조합하며 마치 새로운 가상의 부산의 모습으로 재구성 하였다. 기억과 연결, 가상 이라는 세가지 주제 아래에서 다양한 설치 미술 작품들을 선보이며 새로운 도시 공간을 구축해낸 모습들이 흥미롭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동네만 하더라도 불과 몇 년 사이에도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많은 일상의 풍경들이 바뀌었고 또 그 변화속에서도 나는 마치 원래 그랬던 것 마냥 또 빠른 속도로 적응하며 나의 태어난 동네를 익숙하게 바라보며 지내고 있다. 심지어 그런 빠른 변화 속에서도 종종 권태로움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낡고 오래된 부산의 풍경들 또는 그간에 변화된 여러 모습들을 포착하여 다시 새로운 가상의 이미지를 구현한 이 작업들이 일종의 익숙한 것을 다시 한번 새롭게 발견하는, 또는 빠른 변화에 무뎌져 버린 감각들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작용을 위한 전시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정된 주거공간과 활동범위 내에서 대부분의 일상을 보낸다. 특히 어릴때 부터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서 지금껏 계속 지내온 경우에는 더욱이 그렇다. 그 공간이 좋아서, 익숙해서 또는 편안하다는 이유로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도있지만 제 아무리 익숙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매일매일이 똑같은 생활과 똑같은 환경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권태로워질 수 밖에 없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당장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나버릴 수 없는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또는 실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주거환경이 곧 모든 일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일상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해프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해프닝은 공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별 특별할게 없는 일상의 반복과 연속인 것이다.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환경은 부지런히 변화하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지만 익숙한 동네에 오랜 시간을 머무르다보면 그 변화 조차 일일히 감각하지 못한다. 10년, 20년전의 우리 동네와 지금의 우리 동네를 비교해보면 정말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왜인지 나는 그 변화들을 꽤나 무딘 감각으로 느껴오지 않았나 싶다. 이 오묘한 기분을 무어라고 설명해야 될 지 잘 모르겠지만 내 주변 환경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나의 생활에 직접적인 변화나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일 때, 또는 그다지 나와 관계 없거나 내 관심사 밖인 경우 그 변화를 덜 감각하고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권태로움이라는 감정 안에서는 새로운것들을 발견하고 인지하는 감각이 더욱 느리다.


 




어찌됐던 이 오래되고 낡은 도시를, 그리고 빠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는 도시 곳곳의 모습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고 재조명 한 오브제들이 매우 사랑스럽기도 하고 익숙하며 또한 아름답다. 위 작품은 어디든지 옮겨달라고 부탁하는 정체 불명의 수상한(?) 가방이 불특정 다수의 부산 시민들의 발걸음에 이끌려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정처 없이 방랑한다. 그리고 가방에 부착된 카메라로 예측할 수 없이 마주치는 풍경들을 기록한다. 우리는 가방의 다사다난한 경로들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주로 친근하고 낯익은 풍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고양이를 포착한 시선, 낡고 오래된 골목길이나 택시와 버스같은 이동수단을 타고 여행하는 모습들이 꽤나 귀엽다. 외에도 부산 시내 곳곳에서 포착한 여러 흥미로운 글들을 채취하여 매달아 놓은 작품 역시 웃음을 유발한다. 그 출처는 아마 현수막이나 옥외간판, 스티커 또는 하찮은 벽보라던지 여기저기 휘갈겨진 낙서들 등등 도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실상 우리를 에워싸다시피 하는 많은 광고 메시지들 틈에서 재미있는 것들을 발췌해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우리는 도시에 흩뿌려진 많은 문자들 사이에 과부하가 걸려 허덕이고 있지만 또 그 와중에 눈길을 사로잡는 특정한 글귀에 시선을 뺏기기도 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것들을 감상하고 되뇌어 보기도 하며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남기도 한다. 모두 우리가 의도하고 의식한 행동들이 아니지만 도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이 전시장에서는 그와 반대로 도심속에 흩뿌려져 있던 여러 글귀들을 의식적으로 관람해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연성이 없는 맥락들을 재조합한 글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음미하는 즐거운 재미가 있었다.


사실 이 무인 전시관 (아이테르) 역시 아주 낡고 오래된 목조 주택 건물을 재 가공하여 탄생한 갤러리이기 때문에, 이번 전시 주제와도 아주 일맥상통하는 묘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부분을 포착해 낸 작가가 이 곳 갤러리를 3D 모델링하여 새로운 가상 공간으로 창조하고 그 가상 공간의 갤러리 안에서 또 다른 작품을 전시하며,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독특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시도한 기획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관람자가 직접 가상 세계를 구현한 작품속을 체험 할 수 있으며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공간을 탐험하며 그 안에서 출구를 찾아 나가는 여정을 그려준다. 실제 갤러리 안에서 또 다시 가상의 갤러리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전시 중인 가상의 작품을 본다는 개념이 마치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것 처럼 신선한 관람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런 익숙한 풍경들을 재 조립, 창조하여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기록 한다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그 장소에 대한 오랜 애정과 사랑을 입증하는 실험적 태도가 아닐까. 오랜시간 똑같은 환경에 놓여 권태로움에 지쳐있는 나에게 조금 더 익숙한 것들을 창의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할 영감을 제시 해 주는 전시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물론 그렇다고 이 권태로움을 하루 아침에 벗어 던지는 해방감을 느끼지는 않겠지만 뭐랄까 오랫동안 지내온, 내가 자라온 동네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는 따뜻한 부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가상 공간 갤러리 탐험중

나만의 방식으로 조립, 가공하는 굿즈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다.

 

 

 

 

 


여행이나 휴식 따위의 것과 비교되지 않는 새로운 환기 방법을 제안한다. 세 명의 작가는 당신을 평화로운 일상으로부터 강하게 나꿔챈 장대비이자, 폭풍우다. 우리는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목표가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이 전시를 디자인하였는데, 발칙하게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는 당신을 위해 진심으로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도록 전시를 기획했다. 당신은 목적으로부터 멀어질 때 불안을 느낀다. 이루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멀어진 일이 중요한 일 일수록 불안은 더욱 커진다. 효율적이지 못하고 쓸모없는 정보들로 가득한 이 전시를 감상하는 시간 동안 그대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더 큰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제목 그대로 이 전시는 그대를 위해 휴식과 감상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 전시를 보는 것에 드는 에너지는 이 전시를 탈출하는 것에만 쓰이길 바라며, 아무 짝에 쓸모없는 정보들은 그대에게 견딜만한 스트레스를 선물하길 원한다.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예기치 못한 전시를 만나 전시장에 어쩔 수 없이 표류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당신은 항해 중 표류했다. 작품을 보기 전에 당신의 캘린더를 보길 바란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전에 당신의 목표를 끊임없이 떠올리길 바란다. 당신은 이곳에서 끊임없이 원하지 않는 무언인가를 끊임없이 알게 되지만 당신에게는 감상할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며 쓸모없는 것을 긍정하지 않아야 한다. 이 전시에 대한 호기심보다 쓸모없는 감상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크길 바란다.

결국 목표를 이루고 싶은 마음과 목표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인식하길 바란다.

지금 발전이 멈춰있는 당신이 불안과 평안 중 무엇을 느끼는지 감각하고 전시장을 나가길 원한다.

 

 


 

 

 

8월에 관람하고 온 전시 리뷰를 뒤늦게 작성해보고자 한다. 이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한 작가님의 초대를 받아 찾아가게 되었는데 장소는 전포동에 위치한 ‘별일’이라는 작은 갤러리이다. 이곳에서 진행했던 전시 제목은 “Drifting in the balchic sea”이다. “발칙해로 표류하다, 떠다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표류’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하는 전시다. 전시 팜플렛을 보면 독특한 표류수칙이 몇가지 적혀있다. 그 첫번째, 표류자라는 것을 잊지 말 것. (전시장을 나갈 때 까지) 두번째, 작품을 보기 전에 내 할일을 상기 할 것. 세번째, 작품이 쓸 데 없다고 느낄 것. 네번째, 전시장에서 작은 휴식도 갖지 말 것. 다섯번째, 작은 것에 호기심을 가지지 말 것. 이라는 총 다섯가지의 수칙이 적혀있다. 이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들은 부디 이 조항을 염두하며 관람을 해야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번째, 다섯번째 조항 때문에 아마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이 수칙을 실패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특히 다섯번째 조항은 미술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들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조건이 아닌가. 아무튼 팜플렛부터 발칙하기 그지없는, 도대체 이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표류’가 무엇일까 상상하며 이 난파호에 발을 딛어보았다.

 

 

 

 

 

전시에서는 '표류'를 마치 조금은 불안한 휴식과도 같이 묘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전시를 보고있는 이 시간만큼은 그다지 목적성이 없는, 말 그대로 별 생각 없는, 별 의미없는 행동들을 관람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 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작품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이리저리 경쟁에 치이며 숨 쉴 틈 없을 정도로 바쁘게 흘러가는 현대사회에서 한번쯤 바다 위에 둥둥 표류하는 목적지 잃은 난파선 마냥 우리가 의도적으로 '의미없는 시간'들을 보내보자 라는 것이 이 전시의 궁극적인 목표였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표류라는것은 내게는 휴식의 의미보다는 '고립'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목적지가 있지만 잠시 쉬어가는 것과 아예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정체된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정말로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시간을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한 잠깐의 휴식의 시간으로 절대로 여기지 못할 것이고, 그 말은 즉슨 진정으로 하루하루 인생을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 전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표류=휴식' 이라는 의미가 비로소 성립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과연 이 난파호에 발을 딛어 잠깐이라도 의도적인 표류를 즐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라는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비슷한 예로 옛날에 이런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2008년도 쯤 이제 막 장기하와 아이들이라는 인디밴드가 '싸구려커피' 라는 곡으로 급부상 할때였다. 이 노래의 가삿말중에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라는, 누가봐도 평범한것 보다는 조금은 궁핍한 처지가 연상되는 노래가삿말이 있는데 누군가 이 노래를 듣고 이런 평을 했더랬다. 장기하가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의 이미지를 미학적이고 위트있는 가삿말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사실 가난과 전혀 무관하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인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아주  설명해주는 적절한 예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즉 인생에서 의도적인 표류의 시간 (쓸모없는 시간)을 가져보자 라고 말하는 시도가 사실은 정말로 목적지를 잃은 채로 표류해 본 적이 없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바쁜 인생을 살아가는 작가들이 모여서 이 전시를 기획 하였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로우면서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닌가 라는 감상을 해보았다. 사실 내가 지나온 표류의 시간들은 고립 그 자체였고 어쩌면은 사회, 세상과의 단절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시간이 내게 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잠깐의 '정체' 라고 전혀 느낄 수가 없었고 그렇게 영영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조용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전시가 내게 주는 표류의 의미는 의도적인 불안한 휴식이 아니라 그냥 '불안'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표류를 즐길 자격에 대한 생각을 논하다보니 문득 또 생각나는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몇년째 계속 하나의 트렌드 마냥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단어로써 자리매김 해왔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번아웃'이라는 단어 역시 마치 힐링이라는 단어의 짝꿍처럼 sns나 여러 플랫폼에서 사람들의 지친 감수성을 자극하는 단어로 종종 등장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이 그동안 번아웃 상태였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는데 사실 이 번아웃이라는 단어 역시도 절대 아무에게 아무렇게나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거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파고들어 체력을 완전히 다 소진한, 열정적으로 뭔가에 쏟아부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꽤나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것에 진심으로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에너지를 다 소모 했으므로 번아웃 상태로 진단 할 수 있겠습니다." 라는 말은 결국 내가 가진 열정의 에너지를 온전히 쏟아부었다. 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에 쉽게 질려서 끈기가 부족했거나 혹은 적성이 맞지 않아서 마음을 붙이지 못한것 그 외에도 그냥 그저 게으른 사람이라서 등등 여러가지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로 사소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더군다나 그 스트레스의 근원을 찾는 노력 보다는 그저 그것들을 모른척하고 회피 해 오기만 했었던 사람들이 어느날 문득 '번아웃'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아, 내가 번아웃 이었구나."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당신은 그렇게 말 할 자격이 없다"라고 냉정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결론은 이 전시에서 작가님들이 의도하고자 했던 '표류'는 정말로 열심히 살아온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짜릿한 '일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산적인 '목적성 잃음'을 실행할 수 있는, 열심히 살아온 작가님들의 노고가 새삼 대단하고 부럽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다시 맨 위 상단 전시 안내문의 일부를 가져와보자. "이 전시를 보는 것에 드는 에너지는 이 전시를 탈출하는 것에만 쓰이길 바라며, 아무 짝에 쓸모없는 정보들은 그대에게 견딜만한 스트레스를 선물하길 원한다.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예기치 못한 전시를 만나 전시장에 어쩔 수 없이 표류하는 것이다." , "결국 목표를 이루고 싶은 마음과 목표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인식하길 바란다. 지금 발전이 멈춰있는 당신이 불안과 평안 중 무엇을 느끼는지 감각하고 전시장을 나가길 원한다." 라고 아주 단호하고도 냉정한 말투로 관람자들에게 마치 경고하는 듯 얘기하고있다. 이 난파호에 몸을 실어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편안한 정신적 안식을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되려 견딜만한 스트레스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는 점,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인식하길 바라며 불안과 평안 중 무엇을 더 강하게 느꼈는가를 감각하고 전시장을 나가길 바란다고 말해주고있다. 내가 이 전시에 대해 마치 '불안한 휴식'을 제공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이  전시소개글은 관람자들에게 인위적인 휴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사실 너 불편하지?" 라고 꽤 공격적인 태세로 질문을 하는 것만 같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위에서 다 얘기한 셈 이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내게 있어서 표류는 '불안'에 가까웠고 의도적으로 쓸모없는 시간을 보낸다는 역설적이고 독특한 발상은 그럴만한 자격이 주어진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달콤한 '일탈'이다. 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일탈의 시간을 스스로가 누릴 자격이 있다고 판단 될 만큼, 매사를 의미있고 진정성 있는 시간들로 채워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나 자신에게 바래본다.

 

 

 

 

 

 

인류대멸종 : 1. 개인의 멸종

2022.04.01. - 2022.04.20

기신

김정훈

Schreiben

부산 아이테르

[인류 대멸종 : 1. 개인의 멸종]은 아이테르의 인류대멸종 기획전시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이다.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가치, 기술, 지식, 규범들을 학습하고 끝내 획일화되어 개인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재 세상을 기신, 김정훈, Schreiben 3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해석으로 아이테르 전시공간을 채운다.

'기신' 작가는 멸종되고 있는 개인의 모습을 상상력을 더한 일러스트로 작업하였다. 작가는 특유의 살결과 근육의 질감을 표현하는 붉은 선들로 이번 작품을 완성하였다. 작가의 그림 속에는 피사체들은 특별한 개념을 지니고 있는 물건과 함께 등장하게 되는데, 이 물건이 어떤 상상을 통해 피사체 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며 작가의 전시에 깊이 빠지게 된다.

'김정훈' 작가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고 영감을 얻어 대추가 익어가는 현상을 사회화에 빗대 표현한다. 우리들이 시련을 받으면서 모두 비슷해져 가는 모습을 대추 한 알 시와 대추 프린팅, 모형을 전시하였고 인간의 형상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설치작품 'no/achromatic'을 통해 마네킹 두 개에 각각 개성인과 몰개성인을 표현하여 대비되는 이미지 속에서 개인의 존재성 대하여 고민하게 한다.

'Schreiben' 작가는 멸종된 개인의 개성을 전시공간에 살려낸다. 대부분의 인류가 내보이지 못하고 숨기는 것을 작품으로 선보이며 서브컬처를 무시하는 주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비주류 장르에서 탄생한 수준 높은 설치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비주류 장르가 주류보다 못하다."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그리고 벽에 빼곡하게 붙어있는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가져야할 선택기준은 장르가 아니라 개인의 진심과 시간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개인의 멸종 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보고왔다. 즉 인류 대멸종. 요즘 몇몇 전시를 가보면 지구종말, 멸종, 환경파괴와 관련된 주제들이 꽤 많은데, 이 전시 주제 역시 '인류 대멸종'이라고 하기에 환경과 관련한 멸종을 얘기하는 것일까? 했는데 그건 아니고 개인의 개성과 특색이 사라진다는 의미로써의 멸종이었다. 

 

회화부터 설치미술까지 두루 전시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설치미술 작품이 제일 임팩트 있게 다가온 부분이 있다. 물론 저 위에 마치 사이보그를 형상화 한것 같은 회화 그림도 내 취향저격이긴 했는데 설치미술 작품이 아무래도 압도적 임팩트가 있지 않았나. 이 무인 전시관을 방문한것은 이번이 아마도 세번째인데 처음 방문 했을때는 화장실 문이 닫혀있었다. 물론 열어보고픈 호기심도 꽤 들었었지만 문닫힌 방은 열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으므로 허튼 짓거리는 삼가하고 조용히 관람하고 왔었다. 무튼 이번에는 화장실 공간이 개방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대추 한 알' 이라는 시에 영감을 받고 만들어진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대추가 익어가는 현상을 사회에 빗대어 표현했다는데, 과연 그건 익어가는건가 곪아 가는건가. 아마도 후자의 느낌이 좀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당신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보상 : 승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잃음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꽤나 인상적이다. 당신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그러나 보상은 승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잃는 것. 여기서 의미하는 '승리'라는건 사회의 척박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걸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승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잃는다고 한다. 즉 '생존'은 하였으나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은 모두 앗아가버린다는 참혹한 결말을 뜻하는 것 같다. 치열한 현대 사회의 경쟁속에서 그저 부지런한 일꾼으로써 '존버' 한다는것은 결국 전속력으로 색깔을 잃어간다는 의미를 반영하는 것 아닐까. 

 

그럼 결국 부지런히 존버 할것인가 VS 존버를 거부하고 색깔을 잃지 않는 노력을 할 것인가 이 두가지 줄다리기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것이 평범한 현대사회인의, 또는 젊은이들의 고민인것이다. 우스갯 소리로, 종종 하루하루 썩어간다는 기분이 드는게 정말 하루이틀 일이 아니므로 평범한 직장인으로써는 저 고민과 갈등이 굉장히 크게 와닿는 편이다. 뭔가 '획일화' 되어 간다는 기분이 두려워 계속해서 새로운것을 시도해보고 적극적으로 생산적인 활동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이나 큰 틀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도돌이표 같은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것이 분명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또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이 계속되는 갈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찾고자 하고 지키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굉장히 숭고하게마저 느껴진다. 누군가는 그런 노력을 우습게 여기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차가운 시선들 사이에서 굳건히 내 색깔을 지키고자 한다는게 그 얼마나 대단한 노력인가.

 

작품중에 코로나 마스크로 특정 신체부위를 가린 그림이 있었다. '마스크'라는 용도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꽤나 사회적으로 엄중한 책임감을 갖고 많은 세계인들이 2-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스크를 내내 쓰고 생활을 하였다. 물론 그 목적 자체는 '방역'이라는 특수한 의미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마스크를 쓰는 행위 뿐만 아니라 활동영역과 시간까지, 점점 개인의 사생활 깊숙히 통제가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야 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가지면서 그 목적이 물론 이로운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유'가 통제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마스크'의 특수한 목적성을 떠나서 그런 통제된 생활 패턴을 살면서 똑같은, 획일화된 일상을 살아가는게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마스크 착용을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획일화 된다는것, 똑같아진다는것을 굉장히 불편해하고 꺼리는 한 인간으로써 이 사회에서의 '승리'는 결국 색깔을 잃고 다양성을 잃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내가 출근할때 집을 나가기 전, 옷걸이에 내 '자아'를 살짝 벗어놓고 나가야 한다. 라는 것인데 내 색깔이 강하면 보통의 직장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다지 그것이 장점으로 활용되기보다 유난스럽고 예민하고 튀는 인간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근전에는 자아를 살짝 벗어놓고 나간다.' 라는 생각으로 몇년째 그 생활을 하고있지만 어떤 날은 여전히 그 행위(?) 자체가 꽤나 울적한 기분으로 다가올 때가 종종 있다. 흔히 말하는 '현타'온다는 감정인데, 어쩌면 나는 이 '현타'스러운 감정과 계속해서 싸우는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작품중에 서브컬쳐와 비주류 문화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비주류'적인 취향과 그 문화에 대한 관심, 애정 그 자체도 종종 무시되는 현상이 여전히 알게모르게 언제나 '획일성'을 강요받고 있는 모습들 중의 일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래 '김정훈' 작가의 말 중에서 마치 우리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듯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이 있어 그 일부를 발췌하며 마무리 해본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아를 가진 인류는 멸종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굴레 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정해준 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 각자의 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 되려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내봅시다. 멋지게 같이 해내봅시다.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다른 숨을 쉬니까." 

 

 


 

 

작가의 말

기신

모두가 탄생을 기점으로 저마다의 시선과 기준을 가지며 바라보고 보인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환경 및 상황 속에 맞닿고 노출이 되어 자신의 모난 기준과 의도를 들켜버리고 만다. 의도치 않게 보여버린 인물들의 얼굴엔 눈가에 드리운 선들과 흔들리며 퍼져가는 동공으로 마주하고 있다. 개성이 멸종되어 보여버릴 가치를 잃어버린 지금, 인물들의 외면으로 노출되는 모습들은 굴레에 벗어나 이전과 다른 모습들인가, 그마저도 몰개성화된 일환인가.

 

사람들은 시선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만일에 시선을 대비하고 가꾸어간다. 애석하게도 노출이 될 시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들로 마주하곤 하는데, 의도를 가지고 계획을 체계화할수록 떳떳함의 기준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치밀함보단 자연스러운, 극단적인 날것의 환경 속에 노출된 멋스러운 캐릭터들로 상황을 대변함으로써, 만일을 대비하는 이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 자신이 우려한 모습들의 의외로 나쁘지 않았음을.

 

 

김정훈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굉장히 곤란해집니다. 나에 대해 밝히는 것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 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뭘 하고 어떤 집에 살고 옷은 어떤 것을 입고 차는 뭐고 돈이 많고 적고..... 이런 것에 있어서는 굉장히 청산유수의 달변가가 됩니다.

 

정작 나 자신은 잘 모르면서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빈 껍데기인 상태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자가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교육이나 tv속의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들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그게 진리인 것 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며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매도하고 비난합니다. 또 유행에 편승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흔히 말하는 철지난 것 같은 옷차람이나 밈(meme)등을 사용하면 조롱을 당하죠. 참 비참한 현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우리는 점점 몰개성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아를 가진 인류는 멸종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굴레 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정해준 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 각자의 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내적과 외적으로 모두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세상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 되려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내봅시다. 멋지게 같이 해내봅시다.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우리는 모두 다른 숨을 쉬니까.

 

Schreiben

저는 퍼리입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퍼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동물 인간을 주제로 하는 장르입니다. 서브컬쳐 중에서도 꽤나 마이너한 장르이지요. 제가 왜 퍼리를 주제로 작업하는지를 말씀드리면, 사람 몸에 동물 머리가 달린 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동물만이 가지는 야성미나 귀여움에, 사람만이 가지는 복잡한 서사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환상적인 조합이지요! 아쉬운 건, 퍼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 음지로 숨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퍼리뿐만 아니겠지요. 아름다운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주지 않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내 것은 대중문화가 아니야, 하면서 숨기기만 하면 대중은 당신의 그것이 뭔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그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진부한 것들뿐일 터이고, 결국 진부한 그것들만이 주류가 됩니다. 새롭고 재미있는 건 하나도 없는 세상의 탄생이지요. 저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를 당당하게 내보이겠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것을 보여주세요.

 

 

 

 

 

 

1월 2일부터 현대미술관을 다녀왔었다. 물론 전시를 보기위해서.. 그러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이제서야 포스팅을 올린다. 2022년의 첫 전시회 방문이었고 안타깝게도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방역패스가 실시중이라 전시회도 예외없이 방역패스를 적용중이었고 (물론 지금은 카페, 식당을 제외한 영화관, 전시회 등등은 방역패스가 해지되었다.) 미접종자인 나는 pcr 검사를 통해 음성 확인증을 문자로 발급 받고서 찾아갈 수 있었다. 이 포스팅은 <경이로운 전환>과 <그 후, 그 뒤>  이 두 전시에 대한 나의 기록이다.

 

 

 

 

<경이로운 전환 :  The phenomenal Transition>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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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 가상화폐, 부동산에 대한 뉴스들이 폭발하고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 노동현장에서의 사고들이 연일 보도되며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시대적 현상들 간의 공백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경이로운 전환》은 돈이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노동 없는 소득이 생긴다는 믿음이 상승하는 것에 반해 점차 아래로 꺼지는 인간노동과 그러한 노동력을 발휘하는 노동자의 재등장에서 감지되는 현실 세계의 작동원리를 우리 시대의 주요한 운동성으로 주목한다. 이 전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의 반복적인 운동성에 대해 서술하는 13점의 작품을 상호 연결하여 우리 시대의 현실 이해에 재도달하고자 한다.

 

  우리 시대에 소득을 얻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노동자가 되어 임금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노동하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임금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 사용권을 넘겨줌으로써 받게 된다. 그에 반해 불로소득은 그 노동력의 사용자로서 얻게 되는 자본가의 소득이다. 자본가는 자신이 투입한 것들, 예를 들면 기계. 땅, 건물 등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빈 공장이나 작동하지 않는 기계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이윤은 노동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불로소득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노동력 혹은 타인의 노동소득을 그 원천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자본가가 투입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이 회수되면서 생기는 불로소득은 그 관계 안에서 다시 자본이 된다. 자본이 된 돈은 이처럼 태생적으로 타인의 노동력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한편 자본의 투입과 회수는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생산되고 판매되어 이윤, 즉 돈으로 돌아오려면 그 사이사이에 시간적·공간적 공백이 필요하다. 이 공백을 이어주는 것은 상업 어음, 담보, 대부 등의 신용거래이다. 자본가는 당장 돈이 없더라도 신용을 통해 이러한 가공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다. 가공의 자본은 애초부터 노동자와의 관계 안에서 생산한(할) 상품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계의 반복이 상품을 돈으로, 돈을 자본으로 만들어주고, 자본은 무한 증식할 수 있게 한다. 상품에서 돈으로, 돈에서 자본으로의 무차별한 교환관계와 이동 속에서 인간 노동력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그것이 자본의 기원이라는 사실은 잊혀 진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을 통해 자본이 된 돈은 산업자본가를 거쳐 상업자본가, 대부자본가, 지주 등에게 분할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력 대신 기계, 주식, 땅, 건물 그리고 화폐가 그 가치를 낳은 것으로 오인된다. 여기에서 ‘놀랍고도 신비로운’ 믿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허상이지만 가상-현실로서 우리 시대를 이끄는 주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전세계적인 감염병의 도래와 그로 인한 격리와 봉쇄 속에서 자본의 투입과 이윤 회수 사이의 공백은 더 커지고 이 공백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자본을 끌어오는 방식의 반복으로부터 자본은 끊임없이 자본이 되어 간다. 그럴수록 이와 맞물려 있는 노동력 또한 위기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노동 혹은 노동소득의 끊임없는 가치 하락이다. 감염병으로 인해 다양한 위기에 대한 인식이 커지는 가운데 전방위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환의 시도들이 목격되지만, 전지구적으로 맞이한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은 자본 축적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증식이 불러온 모순과 그로 인한 인간의 위기이다.

 

  이 전시는 결국 노동력의 가치 하락이라는 위기가 이윤 창출을 통한 자본 축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내재된 운동 법칙임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우리 시대는 자본의 축적과 확장을 통해 체제가 유지되는 사회다. 자본주의의 자기혁명을 위한 운동이 마치 인간과 사회를 위한 필연적인 ‘선(善)’인 것처럼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이 결코 진리일 수 없다. 그 증거는 우리 사회에 나타난 수많은 증상들을 통해 감지되고 있다. 이 운동성을 놀랍고도 신비로운 것, 나아가 기괴하고 불쾌한 것으로 읽어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전환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 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서문에서 읽었듯,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시장 경제가 하락하다시피 하고 그로인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서 이 사회적인 격리와 봉쇄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흘러가고 있는 시장 흐름의 변화와 모습들을 관찰하고 조명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작품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노동력이 급 하락하고 있는 현 시점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가 강조하고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자본의 기원'이라 불리는 인간 노동력의 가치를 밝히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시서문 일부 발췌 요약>

 

 

"자본가는 자신이 투입한 것들, 예를 들면 기계. 땅, 건물 등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빈 공장이나 작동하지 않는 기계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이윤은 노동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상품에서 돈으로, 돈에서 자본으로의 무차별한 교환관계와 이동 속에서 인간 노동력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그것이 자본의 기원이라는 사실은 잊혀 진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을 통해 자본이 된 돈은 산업자본가를 거쳐 상업자본가, 대부자본가, 지주 등에게 분할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력 대신 기계, 주식, 땅, 건물 그리고 화폐가 그 가치를 낳은 것으로 오인된다."

 

 

"전세계적인 감염병의 도래와 그로 인한 격리와 봉쇄 속에서 자본의 투입과 이윤 회수 사이의 공백은 더 커지고 이 공백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자본을 끌어오는 방식의 반복으로부터 자본은 끊임없이 자본이 되어 간다. 그럴수록 이와 맞물려 있는 노동력 또한 위기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노동 혹은 노동소득의 끊임없는 가치 하락이다."

 

 

"이 전시는 결국 노동력의 가치 하락이라는 위기가 이윤 창출을 통한 자본 축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내재된 운동 법칙임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

 

 

 

A working History LU Chieh-Te : 직업의 이력, 루치에테

 

 

 

여기는 "직업의 이력 - 루치에테" 라는 책을 한데 모아서 전시중이었는데 '루치에테'라는 한 인물의 인생에 걸친 직업의 변화에 대해서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 책이었다. 많은 직업의 변화와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아온 그의 이야기는 사실상 자서전이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였는데 어린시절 농사를 지었던 경험부터, 공장, 호텔 등등 나아가서 투자를 하기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그의 노동의 변화는 '노동과 노동력'을 주제로 얘기하는 이 전시 기획과 아주 잘 어울리는,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미술작가인 '저우위정'씨는 이 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생동감 넘치는 직업적 이력을 써 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달간의 인터뷰를 필요로 했고 이상적으로 생각한 대상은 바로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중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3일동안 신문으로 구인광고 낸 뒤,  많은 후보자들 끝에 '루치에테'씨가 가장 이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결정을 짓고 그의 인생을 인터뷰 하면서 하나의 '책'으로 엮게 되었고 바로 그 책이 이 전시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 

 

이 책을 다 읽어보면서 느낀 부분은, 그가 노동력의 아주 아주 가장 기초의 단계에서 현재에 오기까지 얼마나 길고 오랜 시간을 노동에 쏟아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을 다 부었다고 해도, 아니 그의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노동의 가장 기초가 되는 '노동자'에서부터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시장 경제에 존재하는 모든 노동의 단계들을 하나 하나 다 밟아 온 과정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의 인생이 곧 노동이었고, 그 노동력의 가치와 결과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파란만장하고도 화려한 이력서와 같다.

 

그는 여러 직업을 거쳐 오면서 오랜 시간을 '노동자'로써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모습은 시장 경제에서 봤을 때 아주 정직하고 성실한 방식으로 천천히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어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중년이 된 지금으로써 그의 인생은 젊었을 때시절 보다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당연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쉽고 빠르게 '자본가'의 단계에 이르를 수 있을까. 이 부분을 늘 요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성실하게 살아온 인생과 숭고한 노력들을 보면서, 마치 불로소득만이 큰 시장을 형성하고 돈을 번다는 무의식적인 착각이 아니라, 그 밑으로는 노동의 기초가 되는 '노동자'들의 신성한 땀이 있기에 동시에 '자본'이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을.. 필히 자각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이야기:

 

"오늘날 음식을 비롯한 여타 제품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현 환경적 가치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요소를 마련해야 한다. 이 작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물은 매개로, 안료는 오염원으로 작용한다. 이 두 물질이 섞이면 하수가 된다. 그러면 하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모방하고, 오염물질은 남겨져 종이 위에 침착된다. 하수구에 가까워질수록 오염이 더욱 두드러지듯, 이러한 반복적인 움직임의 결과로 종이는 색종이로 물들어 간다. 이 작품은 환경오염 과정을 모티브로 삼은 혁신적 제작 방식을 보여준다. 

 

 

 

 

눈물이야기:

 

"가게를 창업하려면 유동인구가 많은 상권을 물색해야 한다. 사람이 가장 가치있는 자본이라는 말처럼, 투자를 할 때는 고가의 임대료를 지불하더라도 그 이상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고객이 실질적인 자본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고 가능한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손님은 줄었으나 임대료는 조금도 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건물주가 최고의 투자임을 알게 된다."

 

 

 

 

 

땀이야기:

 

"하던 일이 자동화 기계로 대체되면서, 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직업을 찾아다녔다. 배달업은 그리 어렵지 않을뿐더러, 기계가 거리를 활보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배달앱으로 주문을 받고 내비게이션을 따라 오토바이로 상품을 받아서 다시 내비게이션을 따라 지정 주소로 배달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배달에 필요한 기술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또한 기계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내 몸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후, 그 뒤>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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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란 있는가. 현재, 우리는 다음 세대의 미래를 담보로 하는 기후 비상 상황에 살고 있다. 진단은 분명하지만 해결책은 아직 불확실하다. 인간의 한정된 예측을 초월하는 징후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를 의식한다. 과연 이대로의 삶을 그대로 지속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시 《그 후, 그 뒤,》는 현재의 양상이 계속 지속된다는 가정 하에 ‘그날’로 설정된 근 미래를 발굴하는 일종의 우화이자 대화이다. 반성적 시나리오로부터 출발해 보건대 과연 무엇이 남아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바다로 흘러들어온 예후적인 현상을 추적하고 미래의 흔적을 통해 그 이후의 모습을 끌어당겨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추측하는 그런 방식으로 ‘다음’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를 재조정 할 수 있는 대안적 열망 가운데 상이한 잠재성들을 인식하고 재구성하여 도달할 ‘다음’을 감지해 본다. 작품들은 장차 다가올 미래의 이미지라기보다 어쩌면 허구적 역사로서, 익숙한 세상에서 무엇이 이상한지 포착하도록 현재를 반영하고 경험케 한다.

 

 

환경과 기후 문제를 다뤘던 전시로, 악화된 환경으로 인해 파괴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 낸 전시였고 그것은 일종의 '우화'이자 '대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과연 무엇이 남아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라는 출발점에 서서 파괴된 환경과 또 그 파괴된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적응해 나가려는 놀라운 생물체들의 생존 번식을 함께 결합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함께 생존하는, 절대 '상생'이 아니라 그저 파괴된 환경에서조차 어떻게든 적응하여 번식하려는 생명체들을 다소 기괴한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오브제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앞선 전시와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현상과 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애정어린 관심과 깊은 고찰을 통해서 탄생한 작품들이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쓰레기 더미들에 붙어 기생하여 번식하는 생물체들의 '진화된' 모습들을 상상하게 하는 많은 전시 오브제들. 그 중 익숙하게 낯익은 물건들이 몇몇 눈에 띈다. 아이스크림 뚜껑이라던지 낡은 신발 등등 쓰레기들로 초토화되고 더렵혀진 최악의 환경 안에서도 어떻게든 생존 하기 위한 생물체들의 처참한 몸부림과 같은 모습들, 과연 그것을 '진화된 모습'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 마저도 진화된 형태라면 진화라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과연 이래서 이 전시를 '우화'라고 칭했을지도 모르겠다. 

 

 

 

 


 

"<보라>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애도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을 하기보다 잠재적 변화와 저항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로써 수세기 동안의 인간 행위가 자연 순환 과정을 결정하게 될 정도로 커지면서 기후 변화에 동인이 되었음을 생생하게 목도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애도하는 20분 가량의 영상. 10개국에서 촬영하고 수백시간 기록된 장면들을 6개의 스크린으로 엮어낸 전시다. 전시 설명은 '종말론적인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글쎄 화면에서 그리는 수세기를 거쳐 흐르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종말론적 의미를 상상하게끔 만드는 무거운 아우라가 전해진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앞으로 계속해서 환경이 파괴된다면 '지구종말'이라는 예언은 더이상 예언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을 누구나 예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가 이미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예측, 상상하며 미리 '애도'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지 않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나 지구에 종말이 찾아왔을 때, 그때는 이미  '애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 전에 '지구종말'을 상상하며 미리 지구를 애도하겠다는 예술가들의 섬세한 마음..... 이것은 과연 애도인가 선견지명인것인가.

 

 


 

 

참 아이러니하게도 심각한 기후 변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오면서 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순간의 광경이 지구의 건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라 할 순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꽤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망해버린(?) 지구를 상상하며 이 행성을 애도 했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요즘 스트레스를 꽤 지속적으로 받았는지 집에오면 미친듯이 밥쳐먹고 포도주 슬쩍 꺼내서 마시고는 (와인아님. 포도주임)  골아떨어져 자곤 했다. 그러다 문득 전시를 보러 안간지가 오래된 것 같아서 포털에 '부산 전시'를 검색했다. 볼만한게 없을까 둘러보던 중에 아주 익숙한 주소에 왠 생각지도 못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매우 익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냥 거의 평생을 내가 살아오다시피한 동네였기 때문인데... (현재도 진행중) "우리 동네에 미술 전시를 하는 곳이 있다고?" 매우 생소하면서도 신기해서 더 찾아볼 것도 없이 "어,  나 내일 당장 저기 가봐야겠어." 라고 생각한 후 바로 꾸르륵 잠이 들었다.

 

 

 

보더휴먼
Border Human

2021.10.26 ~ 2021.11.19

아이테르, 부산 동구 범일로 65번길 21 4층

 

신체 모든 부분이 '인공적'으로 대체되는 시기가 온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기준으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Border Human>을 통해 가상세계 속에 공간을 구축하고, 그 안에 토피아(풍경)를 채워나간다. 한 인간의 모습을 시작점으로 다종다양한 존재물이 뒤섞이는 토피아 속에서 새로운 정의와 가치가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가상세계는 과연 가상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곧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기는 도래할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희미해져가는 경계에서 새로운 인간과 종이 탄생하며, 인간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다. 이때를 위해 나는 작품 속에 그 단서를 하나씩 남겨보려 한다.

If the time comes when all parts of the body are replaced with 'artificial', what standard 

can a human being be called a human being?
Through <Border Human>, I build a space in the virtual world and fill the topia (landscape) in it. 

New definitions and values   will be created in the topia where various beings are mixed, 

with one human figure as the starting point. But does the virtual world exist only in a virtual way? 

The time will come when the boundary between virtual and real will be broken soon. 

New humans and species are born at the blurring boundary between virtual and reality, 

and we will be able to look back on the true meaning of human beings. For this purpose, 

I try to leave the clues one by one in my artworks.

 

 


 

 

 

 

바로 위의 전시인데, 개인적으로 '무인전시'는 내게 처음이었다. 나는 전시 개요 따위 읽어볼 생각없이 그저 낯익은 주소지만 보고 그냥 일단 보러 가겠다. 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위치는 내게 너무나 익숙한 동네에 위치해 있었고 5F는 LOUNGE 4F는 ART SPACE라고 적혀있다. 하여튼 참 신기한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에 ART SPACE가 다 생기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아 뭐 물론 거의 12년 전쯤, 삼일극장, 삼성극장이 사라지기 전에도 그곳에 미술 전시가 열리긴 했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극장을 기념하여 일회적으로 열린 전시였고 이 장소는 또 의미가 약간 다른 것 같다.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갈 아트스페이스라고 생각을 하니 어쨌든 토박이로써는 꽤나 신선한 부분.

 

 

 

 

 

이곳의 아주 독특한 점은, 일반 주택을 개조한 것도 아니고 그 모습 그대로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아니 뭐..리모델링을 한다거나 그럴싸하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전형적인 갤러리의 모습은 (깨끗한 흰 벽 또는 뭐 다듬어진 벽?) 온데간데 없고 그냥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아주 오래된 느낌의 집이다. 그냥 말 그대로 사람이 살던 주거환경 그 모습 그대로. 그냥 가구나 전자제품 따위만 없을 뿐인, 텅 빈 집이었는데  입구가 너무 어두워서 스위치를 켰더니 불이 들어오긴 하더라. 사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전에 무인전시인것을 전혀 몰랐던 상태여서 벨을... 눌러야하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러나 문을 살짝 밀었다가 여시오. 라는 문구를 보고서야 아 문이 원래 열려있나보다 생각하고 들어가게된 것. 

 

 

 

 

 

안내문에 보면 열린 문 외, 닫혀있는 방은 전시 공간이 아니니 출입을 금지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하곤 하는데 그 일말의 호기심이 들려는 찰나에 왠지 모를 스산한 공포가 더 밀려오는 바람에 바로 그런 허튼 생각은 바로 접어뒀다. 저 때 전시를 보러온 사람은 나 혼자였고 전시 관람 도중 만약 또 다른 방문객이 갑자기 들어온다면 난 아마 놀래서 심장이 떨어질것이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관람을 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혼자 있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약간의 무서움이 들었는데, 뇌피셜을 써내려가보자면 동네에서 유명한 미치광이가 혼자 사는 오래된 집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내가 침입했는데, 그곳에는 알수 없는 이상한 기구들이 빛을 내면서 움직이고 있었고 심지어 문이 닫힌 곳은 열어보지 마시오. 라는 꺼림칙한 문구까지 봐버린 상황. 얼른 보고 나가야지 라는 생각을 할 때즈음에 왠지 누군가 들이닥칠 것만 같은? 그런 허접스러운 망상이 머리를 스쳐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서두가 길어서 어렵게 등장한 작품사진. 일단은..다 필요없고 갤럭시 노트9 당장 갖다 버려야겠다. 빛번짐 효과가 아주 라식수술한 내 눈으로 직접 찍은것 마냥 화려하게 나왔다. 어찌됐든 "신체 모든 부분이 '인공적'으로 대체되는 시기가 온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기준으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전시 주제를 생각하며 감상해보았다. 뭐 지금도 신체의 일부를 인공적으로 대체하고 있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분들) SF영화에서 흔히 자주 등장하는 로봇인간 따위를 제각각 형상화 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인간의 모든 신체 부위들이 모조리 인공적으로 대체될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인간의 형상은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그런 독특한 발상을 시작으로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왠지 인간의 신체 부위를 가져다가 괴상한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가 사는 집에 무단 침입한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망상)

 

 

 

 

 

 

 

그리고 나가기전에 한번 더 열려있는 창문을 잠깐 응시했는데 이 마저도 공포영화속 한장면 마냥 스산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두고 커튼을 살짝 제쳐 놓은것도 아마 연출이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괜히 저기서 뭔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하는 생각  (몰입과다) 어쨌든 늦은 밤에 갈수록 더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듬.. 분명히 전시회를 보고 왔는데 혼자 흉가체험이라도 하고 온 마냥 쫄깃해진 심장 느끼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벽에 커다란 흰 종이가 붙어진 방명록을 봤는데, 지인이나 동료들이 많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난 말그대로 그저 STRANGER일뿐.... 인스타 아이디 남길려다가 왠 관종짓인가 싶어 그만뒀다. 펜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라이너로 짧은 방명록을 남기는데 또 왠지 그 순간에 뒤에서 뭔가가 훅 나타나진 않을까 싶은... (이정도면 거의 망상병인가) 아무튼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을 했던 전시였다. 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들로 채워질지 궁금한 장소.

 

 

 

 

 

 

https://aither5.modoo.at/?link=2os1y0qq 

 

[예술협회 아이테르AITHER - 강시라 : 보더휴먼]

부산 범일동 294-2. 10:00-20:00

aither5.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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