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리 어게인 A Dog's Purpose , 2017

제작요약미국 | 어드벤처 외 | 2018.11.22 개봉 | 전체관람가 | 100분

감독 라세 할스트롬 출연 조시 게드데니스 퀘이드페기 립튼브라이스 게이사  더보기

줄거리견생 4회차, 베일리의 빅허그♥ 귀여운 소년 ‘이든’의 단짝 반려견 ‘베.. 더보기

홈페이지www.uphe.com/movies/a-dogs-purpose

 

 

 

정말 오랜만에 집에서 영화를 봤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콕'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그동안 킵해놨던 영화들를 살펴봤는데 쉽게 볼 수 있고 마음도 따뜻해지는 그런 영화 없을까 하면서 고른게 바로 '베일리 어게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베일리 어게인' 후속작으로 나온 영화가 있어서 연이어 본것이 '안녕 베일리'였는데 스토리 라인이 심플해서 내용 이해는 정말 쉬운 편이고 말 그대로 '편하게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맘이 따뜻해지는 영화'를 보고싶은 내 욕구에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런 영화가 있다. 평범한 관람객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연출과 스토리라인 마저 단순하고 평범한 영화인데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등장인물만으로 그런 뻔한 장면들 마저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모든걸 커버해버리는 경우 말이다. 주로 동물과 관련된 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했는데 바로 이 '베일리 어게인, 안녕 베일리' 역시 그러하다.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등장과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의 모든걸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인간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강아지의 삶은 그보다 훨씬 짧다. 바로 그점을 이용해서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이든'이 키웠던 강아지가 계속 환생함으로써 결국 여러 견생을 거듭 반복하며 다시 처음 주인의 곁으로 되돌아 오는 감동적인 여정을 그려놓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강아지 '베일리'는 여러번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주인 밑에서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살아가지만 언제나 목표는 첫 주인 '이든'을 다시 만나러 가는 것이다. 첫 주인 이든을 만나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한 견생도 있었지만 거듭 실패를 반복하면서 우여곡절끝에 주인공 '이든'을 찾아가게 되는 모습을 그리는데, 낯선 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바로 '베일리'라는 걸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이든'과의 추억을 상기시키려 노력하는 베일리의 모습이 감동적인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말이 안되고 비현실적인 부분이라고 느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반려인들의 로망을 가득 채워주는 '선물'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첫 주인을 잊지 못하는 강아지, 그리고 다른 강아지의 몸으로 여러번 환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첫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스토리가 비현실적이란것을 알면서도 괜시리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베일리 어게인' 에서는 주요 인물 '이든'과 '한나'가 등장한다. 둘은 10대 시절 풋풋한 연애를 하지만, 럭비 선수로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고 대학입학만 앞둔 행복한 상황에서 '이든'은 심각한 다리 부상을 당하게 되고 창창할줄만 알았던 그의 선수 미래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나버린다. 그렇게 인생에서 절망적인 시간을 맞게 된 '이든'은 도저히 그런 자신 곁에 '한나'를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매몰차게 이별을 고한다. 그렇게 안타까운 사랑이 끝이나고 이든은 농업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본가에서 먼 곳으로 떠나게 되고 둘도없는 친구였던 이든과 그의 강아지 베일리도 오랜 이별을 맞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베일리'도 차츰 나이가 들어가며 '노견'이 되고 노쇄해진 '베일리'는 그렇게 '이든'을 그리워하면서 첫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된다. 그리고 베일리는 환생하고 또 환생하며 다른 강아지로써의 삶을 여러번 살아가는데, 외로운 흑인 여자의 반려동물이 되기도 했고, 경찰견으로 태어나 임무를 다하는 삶을 살기도 하며 다양한 견생을 살아간다. 흔히 말하는 견생 n년차 강아지로 거듭나는 것이다. 

 

 

 

 

 

특히나 베일리어게인 에서는 경찰견으로써의 임무를 다하고 안타깝게 총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는 '베일리'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오는 장면이었다. 물론 새로운 견생을 시작할때마다 새로운 주인 밑에서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지만 자신의 과거 생을 기억하고 있는 강아지 '베일리'는 언제나 '베일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첫 주인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우연적인 상황을 여러번 반복하며 찾아가게 되는데 현실에서 도통 말이 되지 않는 얘기지만 주인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우연한 상황'과 '우연한 계기'를 놓치지 않고 베일리를 원래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여정이, 어차피 영화의 순수한 감동 포인트를 그저 즐기고 싶었던 나로써는 그런 말도 안되는 '운명론적' 스토리 전개에 괜히 시비 붙여 가며 감동 파괴를 당하고 싶진 않았다. 이 영화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로망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예쁜 선물' 같은 영화로 생각하고 감상하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보면 더 없이 좋을 영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냥 말도 안되지만 왠지 그날 만큼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사랑이 담긴 선물을 주고 받고 싶은 그런 날. 그런 크리스마스와 조금은 닮아보이는 부분이 많아 보였던 영화. 그렇게 첫 주인을 만나는데 성공한 베일리는 그가 어린시절에 아픈 이별을 겪었던 '한나'와의 재회까지도 이뤄주게 됨으로써 행복한 결말을 암시한다. 

 

그저 어디에선가 떠돌아 다니고 살던 유기견이라 생각하고 거둬 들이게 된 '낯선' , '새로운' 베일리 였지만 베일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내가 바로 너의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 '베일리' 라는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필살의 노력을 다하는데, 이든과 어릴적 자주 갖고 놀았던 납작한 럭비공을 창고에서 물어와 이든에게 슬며시 건넨다. 이든은 아무런 기대없이 어린 시절 놀던 방식으로 그대로 럭비공을 던져주고 베일리 역시도 마치 오랫동안 훈련받아온 것 처럼 완벽하게 그 놀이를 해낸다.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이든은 마침내 베일리의 존재를 알아채게 되고 그렇게 아름다운 결말로 마무리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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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녕 베일리 A dog's Journey, 2019> 감상후기 (+줄거리 스포 약간 포함)

안녕 베일리 A Dog's Journey , 2019 제작요약미국 | 가족 | 2019.09.05 개봉 | 전체관람가 | 109분 감독게일 만쿠소출연조시 게드, 데니스 퀘이드, 캐스린 프레스콧, 마그 헬젠버거  더보기 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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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국내도서
저자 : 류시화
출판 : 도서출판더숲 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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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 '한줄도 너무 길다.' 이후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류시화님의 책이다. 어린시절에 류시화님의 인도 여행기를 읽고 한때 나도 인도에 대해 환상을 가득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이 책에서도 류시화님은 인도 사상과 철학, 그리고 오랜 인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많은 얘깃거리들을 흥미롭게 소개해주고 있는데, 나는 인도의 잔인한 현실을 알게된 후 부터 인도에 대한 환상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고유 문화와 명상, 철학, 깨달음 등등 많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엿볼수 있었다. 류시화님의 오랜 여행 경험과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엮은 그의 에세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어쩌다보니 내가 이 책을 두번, 세번에 걸쳐 나눠읽게 되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는 속도감 있게 책 전체를 빠르게 훑어 읽었고 두번째 , 세번째 읽을때는 한 챕터 한 챕터 짧은 이야기들을  곱씹으면서 아주 천천히 읽게 되었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전에 또 한번 책을 음미하며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신념과 정의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딪힐 때 그럴 때도 이 책에서 류시화님이 전하는 주옥같은 얘기들을 다시금 꺼내어 회상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들게끔 하는 그런 책. 그 만큼 이 책에서 류시화님이 전하는 얘기들은 삶 전체를 아우르는 깊은 통찰력을 제시하면서 우리 삶의 지침서가 되어줄만한 '삶의 철학'들에 대한 많은 얘기들을 전달 해준다. 그런 점에서 언제고 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마다 다시금 펼쳐 읽으면서 맘속에 되새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숫자에 포함시킬수 없는 사람 _ 나와 너>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라고 썼다.

부버는 인간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이다."

 

 

인간이 맺는 관계의 두 종류 나-너, 나-그것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고 싶은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나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맘속에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고 그것에 대해 정의 내리고 어디까지가 얼마나 진심의 관계인지를 마치 늘 점검하는 것 같다. 특히나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오히려 고독함, 외로움 따위의 감정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중요한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소통하느냐 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고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을 그릇 하나가 없다면 결국 군중속에서도 나홀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거다.

 

나-너, 나-그것.

 

'나-너'가 순수한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진짜 관계라면 '나-그것'은 존재의 가치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기능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것이라고 했다. 즉 얼마든지 내가 아니어도 비슷한 기능을 가진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그런 흔한 자리. 그게 '나-그것'의 관계다. 공적인 상황에서 맺어지는 나-그것의 관계는 어쩔수 없이 당연한 것이지만 내게 소중한 사람, 내 연인, 가족, 친구들까지 나-그것의 관점으로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 얼마나 외롭고 공허한 일일까. 그럼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수시로 '나-그것'의 잣대로 평가하고 매기는데에 익숙해져 간다. 스스로 고독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너무 외롭다고들 호소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쌍방으로 이루어지는 '나-그것'의 관계는 상상만해도 공기가 얼음장 같이 차갑다. 아니, 그저 공허하기만 하다. 마치 서로 완벽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다른 예로, 내가 상대방을 '나-너'의 존재로 대했으나 상대방은 나를 '나-그것'으로써 대해왔다는것을 알았을 때 그 때 느끼는 상처와 상실감도 우리에게 강한 트라우마를 남겨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또 상대방에게 주기도 한다. 관계는 상황에 따라 '나-너'로 정의 할 때가 있고 '나-그것'이어야할 때를 구분지어야 하지만 내가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건 '나-너'로 유지되어야 하는 깊숙하고도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다.

 

 

나 역시도 '나-너' , '나-그것' 이 두가지 사이에서 미친듯이 혼란을 겪으며 왔다갔다 하는 사람, 아예 둘 중 하나에만 꽂혀 거기에 모든 의미를 다 쏟아붓는 사람 등등 여러가지들을 보았고 경험했다. '나-너'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주 이상적이면서 따뜻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그것'의 관계에 모든걸 쏟아붓는 사람을 상상하면 마치 허울 좋은 껍데기들을 열심히 쓸어모아 담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외로움을 끊지 못한다. 당연히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그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만큼이나 안타까운 건, '나-너'와 '나-그것'의 관계 사이에서 줏대없이 왔다갔다 자기 자신을 계속 시험에 빠뜨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있노라면 나 마저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횡설수설하며 하는 말마다 일관되지 못하고 관계에 대한 평가도 언제나 늘 극단적이고 심지어 수시로 바뀌기까지 한다. 어떤날은 나를 최고로 칭찬해주지만 어떤날은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평가매기는 것 처럼. 그것은 나를 보는 평가 기준을 '나-너'로 보았다가 다시 어느날은 '나-그것'으로 보았다가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수시로 관점을 달리하여 계속 평가 매긴다면 그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일까. 그렇게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는 종잇장 같은 관계를 가면을 쓰고 유지해 나간다는게 얼마나 큰 에너지 소모이며 낭비인지. 결국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되어 스스로에게 비수 꽂는 일이 될거라는 걸,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내가 자초한 일이란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나-너, 나-그것의 관계에 대해 읽으면서 너무 많은 슬픈 인연과 이별과 관계들이 떠올랐다. 내가 진심이더라도 상대방은 내게 그렇지 않은 관계들은 살아가면서 언제가 또 다시 겪을 수 있도 있다. 아마 내 마음대로 그것들을 미리 알아차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느날 그 실체를 깨달았을 때 혹시라도 그동안 내가 쌓아온 '나-너'라는 순수한 마음이 너무 아깝고 가슴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 관계를 끊어내지 못해선 안될 것이다. 냉정하게 그들을 끊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살면서 계속 수많은 관계를 맺고 이별을 겪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를 '나-그것'의 관계로써 대하며 상처를 준 사람들을 끊어내는 일에 계속 맘 아파 해선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런 이별에 담담해지고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참다운 관계를 만들고 유지해나가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닭이 몇 마리인가_생명들에 값하는 삶>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닭과 소와 돼지를 먹는가? 매일 얼마나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그 목숨에 값하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 들여다 보는 것만큼 중요한 명상은 없다."

 

 

마치 이 글을 쓰면 내가 당장이라도 채식주의를 선언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나로써는 종종 육식을 하는 것,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고찰에 불현듯 빠지곤 하는데 그럴때 마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가치관에 따른 자유 선택이라는 결론을 늘 내린다. 그치만 또 다시 '정말 채식이라도 해야되는걸까'라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는데 바로 유튜브로 야생동물 구조 관련 컨텐츠를 보거나 아니면 반려동물로써 강아지, 고양이가 아닌 오리, 돼지와 같은 동물을 키우는 유튜버 영상을 볼 때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뿐,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언제나 '고기는 사랑입니다.'와 같은 얘길 하게 된다는게 꽤나 나 자신이 이중적이게 느껴지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야생동물 영상같은걸 보면서 공감이나 하지나 말던가)

 

 

그런 와중에 닭이 몇 마리인가. 라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읽게 되었는데 통합의학 선구자라는 의사 레이첼 나오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든여덟살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겪은 이야기다.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아침마다 15분씩 함께 명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레이첼도 옆에 앉아 명상을 함께 했다. 그러고 한참 후 눈을 뜬 어머니가 레이첼을 바라보자 레이첼은 어머니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닭을 세고 있었지." 라고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명상을 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실망하고 당황한 레이첼에게 어머니가 이렇게 다시 말한다. 저녁 식사 때 닭고기를 먹고나서, 불현듯 평생 동안 매주 한번이나 두번은 닭고기를 먹었다는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머리로 계산하기 시작했고 두마리의 닭을 52주에 84년을 곱하니 8천 마리가 넘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그 많은 동물들의 희생의 가치가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때때로 남에게 아픔을 준 적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적은 없으며, 누군가에게 거짓말이나 비난을 한 적도 없음을 알아냈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생은 그 닭들의 희생 만큼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어머니는 대답했다고 한다.

 

 

"매일 얼마나 많은 순수한 생명들을!"

"우리와 똑같이 살아 있기를 원하고 행복을 갈망하는 생명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삶을 잘 사는 것 만이 그 생명들에게 값하는 길이다."

"그들이 어느날 꿈속에서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자신들의 수많은 희생에 값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채식과 육식에 대한 생각과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해 조금 도움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채식을 선택하든 육식을 선택하든 가치관에 따라 판단 할 일이며 뭘 선택해도 틀린건 없지만, 채식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순수한 생명들의 희생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인간으로써 그 희생에 헛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채식주의를 한다는게 그냥 풀만 뜯어먹는 간단한 일인것 같지만 영양소 불균형을 맞춰줘야 되기 때문에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 매우 힘들고 까다롭다. 그리고 알다시피 인스턴트나 가공식품에 육류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거의 없고 라면스프만 해도 이미 육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가난한 사람이 채식주의를 하겠다는 것은 굶어 죽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경우엔 오히려 채식을 하거나  healthy food를 지향하는 경우 대부분 상류층인 경우가 많고 그 외 서민들은 맥도날드에서 저렴한 값의 햄버거를 사먹거나 하는것이 일상인 것이다. 우리도 편의점에서 간단한 컵라면 한끼 떼우는게 가장 저렴한 한끼 식사이듯이 말이다.

 

 

어쨌든 채식을 한다는것은 정말 만만치 않는 부분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더욱 '회식'문화를 생각해보면 나 홀로 '채식주의'를 선언하면서 매번 고깃집 회식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 지인, 친구들과 만날때도 식당을 찾을 때 마다 채식 레스토랑 찾아야 하거나 혹은 일반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주문하면서도 '육류'를 빼줄것을 당부하는 것 등등. 채식주의가 한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이렇듯 막대한 수준인데 희생되는 동물들이 그저 '불쌍해서, 가엾어서.' 라는 공감대 만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더욱이 채식주의 생활은 불가능 하다고 본다. (산속에서 자급자족을 하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순간의 감정으로 책임지지도 못 할 '우발적인' 채식주의 선언을 한다거나 채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과한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동물을 사랑하지만 육식주의자 라는게 외람되고 이상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의 희생의 값어치 만큼 나는 가치 있는 삶을 나는 살고있는가"를 질문 한다는것이, 채식과 육식을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많은 생명체들의 희생을 존중함에 있어서 충분한 명상의 가치가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다면, 건강을 해칠 수준으로 과도하게 육식을 섭취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도 커진다. 채식주의자가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 건강을 해칠 수준의 불필요한 육류 섭취는 피할 수 있는 것. 바로 '채식지향'이 어느정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외에도, 책의 제목처럼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 '두번째 화살' 등등 마음속에 깊이 와닿는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배울 수 있는 책이었고 내 삶에서 명상의 시간이 필요할 때, 고독의 시간이 필요 할 때, 또 다시 내가 방향성을 잃었다고 생각 될 때마다 이 책을 집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상에 위치한 동훈 작가님 개인 작업실에서 작은 모임이 열렸다. 작가님들 포함해서 창작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까지 여럿 참여했는데 올해들어서 내가 활동했던 것들 중에 잘한걸 뽑으라면 아마 이 커뮤니티에 참여한게 아닐까 나홀로 창작하는 외로운 아티스트나 혹은 전업이 아닐지라도 창작에 몰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타인 또는 대중과 소통이 필요할 때, 특히 예술적인 의미에서 그런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가진다는게 서로에게 얼마나 생산적인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동훈 작가님 작품

 

 


전업 작가님들 포함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였었는데 타투이스트분들과 디자이너, 일반 직장인들까지 그림 작업 뿐만 아니라 글을 쓰고자 하는분, 음악 활동을 하는 분 등등 전반적으로 '창작'활동에 임하고자 하는 모든 분들이 함께 자리한 곳이었다. 쑥쑥하게 자기소개를 마치고 각자의 작업 스타일과 좋아하는 취향 등등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친목도모를 나눈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각자의 작품이 쌓이게 되면 이 곳에서 작은 전시가 마련 될 수도 있고 그런 추후의 방향성에 대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건 '다작'.

나의 개인적인 생각도 역시 많이 그려보는것이, 한가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려는 고집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나 요즘의 미술은 누구나 창작자가 되고 누구나 sns를 통해 예술가가된다. 작가와 대중의 경계라는 것이 점점 흐려지고있는 추세인 만큼 옛날처럼 미대를 전공해서 졸업을 하고 작가가 작업실에 박혀서 열심히 창작에 몰두하여 여러 작품이 쌓이면 전시를 할 수 있는 그런 루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요즘은 손그림 뿐만 아니라 태블릿 하나로 작업한 디지털 작품으로도 누구나 작가가 되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느냐는 그것이 대중에게 선택받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물론 온라인 마케팅같은 그런 홍보전략의 힘도 있겠지만 내가봤을땐 그 작품이 세련되고 트렌디하냐, 또는 그 안에 젊은 층의 감성을 자극하는 유머요소가 있느냐로 대중적 인기를 끌수있느냐의 중요한 판가름의 기준이 되지않나 싶다.

그러나 본디 예술의 창작은 사실 타인을 위한것이 아니라 창작자 자신을 위한것이 첫번째라고 본다. 그것이 진정성을 전달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 방법이며 선택되느냐 선택되어지지 않느냐는 어쩌면 운에 맡겨 볼 일이다. 슬프게도 나의 취향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할 수 있는 트렌디한 감성이 전혀 아닐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 창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듯.. 타인에 취향에 맞추고자 하는 예술가는 아마도 작업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본업과 창작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도 소싯적(?) 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될것이고 꼭 그림으로 돈을 벌거야. 라는 부담스런 각오를 한 적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되려 그 이후로 그림을 점점 그리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지금은 '잘'그리려 하기보다 '오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고 굴뚝같다. 사실 잘 하는것 보다 오래 유지하는것이 더 어려운 일이란걸...

 

 

 

 

 

 

 

어쩌다 썰이 길어졌는데 무튼 너무 감사하게도 첫 모임이라고 동훈 작가님이 주류 및 식비를 모두 쏘셨다. ( 개좋다 ) 와인이랑 위스키 맥주 다 있었는데... 이걸 다 쏘시고 갱장히 멋있으신 분. 👀 무튼 동훈작가님의 드로잉 북과 필름키링, 작가 햅삐님 일러스트 엽서 및 스티커까지 많은 선물을 무료 나눔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공중그네
국내도서
저자 : 오쿠다 히데오(Hideo Okuda) / 이영미역
출판 : 은행나무 200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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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이라 불리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 '공중그네'라는 책을 읽은 소감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요즘 책장에 오래도록 꽂아두고 읽지 않은채로 방치했뒀던 여러 종류의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읽고 있는데 바로 이 장편소설 '공중그네'라는 책도 아주 오래전에 친구에게 추천 받고 구매한 뒤로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책이다. 어쨌든 여자저차 사연은 뒤로하고, 이제라도 이 책을 완독하게 된 것을 나름대로 다행이라 생각하고있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 보다는 일본 영화를 봤던 경험이 더 많기 때문인지 몰라도 글을 읽으면서 만약 이 책이 영화화 된다면 이 부분은 이렇게 묘사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이 들 정도로 특유의 일본스러운 분위기들이 머릿속에 동시에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글래머러스하고 몸매 좋은 간호사 마유미짱이 주사기를 들고 등장하는 장면과 그녀가 환자들에게 무심하게 주사를 놔주는 장면을 묘사할 때, 늘 그녀의 풍만한 가슴골에 꼭 한번씩 환자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게끔 하는 묘사들이 왠지 그러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괴짜 신경정신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는 마치 5세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는데 심히 돌팔이가 아닌가 의심스러울만큼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환자들을 상담하고 처방한다. 총 5가지 챕터로 구성된 스토리로, 각자 다른 신경 질환을 가진 여러 환자들이 우연히 이라부가 운영하는 병원을 발견하고 찾아오게 되는데 이라부는 찾아오는 환자들마다 구분없이 다짜고짜 '비타민 주사'를 어김없이 처방해준다. 그리고 마유미짱이 환자들에게 주사를 꽂는 장면에서 특히 이라부는 알수없는 '희열감'을 느끼며 환자의 팔에 들어가는 바늘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늘 흥분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흔한 일본 변태 오타쿠 의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변태'와는 거리가 먼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에 훨씬 가까운 캐릭터다. 이라부는 각자 저마다의 심각한 정신 질환을 갖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늘 대수롭지 않은 듯 반응하는것이 포인트인데, 특히 선단 공포증 환자가 찾아왔을 때도 그가 주사기 앞에서 극한의 공포감에 휩싸여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에도 그는 꺄르르 웃으며 주사를 맞히고 "내일 또 와."라는 한마디만 남길 뿐이다. 책에서는 이라부 종합병원을 으슥한 지하에 위치한, 왠지 모를 쉰 냄새가 풍기는 쾌쾌묵은 병원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 말은 즉슨 돈벌이 안되는 낡고 오래된 후미진 병원 그 자체라는 뜻이다. 이런 병원에 다신 오지 않을 거라며 호언장담하며 병원을 박차고 나가던 환자들은 내일도, 그 다음날도 꾸준히 알수 없는 묘한 이끌림에 이라부를 어김없이 찾아오게 된다. 시간 많고 돈벌이 못하는 병원이어서인지 몰라도 이라부는 찾아오는 환자마다 그 환자가 겪고 있는 고민의 상황에 본인이 직접 들어가서 함께 경험하고 체험한다는 것이 '이라부'만의 독특한 진료법이다. 아니, 진료법이 아니라 어쩌면 그는 '놀이'로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무튼간에 이 독특한 이라부만의 처방법으로 환자들은 위안과 생기를 얻고 스스로 깨달음과 자가치유를 거치면서 병을 이겨내게 된다. 그가 괴짜이든 뭐가됐든 어쨌든 정신과 의사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다섯개의 챕터중 개인적으로 내가 특별히 기억에 남으면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바로 '장인의 가발'이었는데 이 환자는 본래 장난끼 넘치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결혼을 하게 되면서 무거운 책임감과 압박감이 그를 옥죄게 했고 그 억누른 스트레스로 인해 충동 장애를 얻게 된 환자다. 그 이유는 와이프의 아버지 즉, 장인어른 되는 분은 자신이 다녔던 의과대학 모교의 학부장 이기도 했고 그만큼 대하기가 쉽지않은, 농담한마디 건네기도 힘든 존재였는데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있지만 애써 모른채하고 있는 장인의 특별한 '비밀'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호시탐탐 장인어른의 가발을 벗겨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그가 어느날 이라부를 찾아와 하소연하고, 이라부와 함께 시시콜콜한 일탈을 행하면서 그 억누른 욕망을 서서히 해소한다.

선단공포증이 있는 야쿠자 , 공연 도중 매번 실수를 연발 하게 된 오랜 경력의 서커스 단원, 장인 어른의 가발을 벗기고픈 충동 욕구로 괴로워하는 의사, 갑자기 슬럼프에 빠져버린 프로 야구 선수,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 강박증이 심각한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 이렇게 제각기 다른 다섯인물이 이라부를 만나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특별한 치료를 받으면서 스스로 마음의 치유를 경험한다.

그러고보면 저마다 사소하지만 예민한 결함을 하나씩은 가지고있다. 초기에는 성격의 일부분이라 볼 수 있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살면서 스트레스와 강한 압박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다보면 그 사소한 결함이 정신적 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어떤 심각한 정신적 장애라도 맨 처음의 그 시작을 살펴보면 그저 단순한 성격의 일부분이었을 뿐. 남들과 다른 나만의 예민한 무언가가 정신적 장애로 발전하기 전에 그 무엇을 자유롭게 해소하고 살아간다면 애초에 큰 병이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든다. 이라부는 바로 그런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게 맞지않는 옷을 입고 괴로워하며 억지로 견뎌내는 짓을 하지말라고 충고하는 것 같다. 남에게 피해주는게 아니라면 그저 내가 생겨먹은대로 살아갈 것. 내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것. 인생은 그저 내가 태어난 성질 그대로 충실히 살아가면 되는것이다.

 

 

 

 

 

프레임
국내도서
저자 : 최인철(Incheol Choi)
출판 : 21세기북스(북이십일) 200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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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을 의미한다. 책에는 많은 다양한 예시들을 통해 '프레임'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프레임'을 달리함에 따라 심리적으로 모순된 어떤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여러가지 흥미로운 실험들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모든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혹은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라는 말들을 자주 접해온지라, 내 마음가짐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이론은 그렇게 대단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익히 알고있는 사실들도 종종 간과하기 마련이다. 어릴때는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의미로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이 교훈을 거의 주입식으로 듣다시피 하기도 했는데, 물론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긍정의 효과를 위해 부정적 프레임을 다시 리프레임 하라는 말을 전달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바로 그 긍정의 프레임이 주는 심리적 모순까지 함께 얘기하고 있다. 주로 광고 회사나 여러 매체에서 이 '아' 다르고 ' 어' 다른 수준의 단순한 차이를 통해 소비자들의 생각의 틀을 바꿔버리기도 하는데 어쩌면 이런 모순된 효과로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하여 그들의 소비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나온 예를 하나 들자면, 세일상품을 충동구매 하는 경우가 바로 이 모순에 해당한다. 만약 원래 정가가 50만원인 상품이 있다고 했을때 어느날 그 상품이 할인가로 2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물건을 구매하면 마치 30만원을 절약한것 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우리는 20만원이라는 지출을 했을뿐 이란거다. 물론 오래전부터 그 제품을 사려고 계획 했으나 비싸서 계속 미루어두다가 할인기간에 저렴하게 산거라면 나름대로 절약의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구매 목록에 없던 상품인데 '세일'이라는 유혹에 이끌려 충동구매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건 사실 그냥 '지출'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프레임은 아주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프레임은 때때로 고정관념이 되기도 하고 부정적인 틀이 되기도 하며 오해와 편견을 만들고 또 위의 예시처럼 객관적 사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레임이라는 것이 꼭 나쁜 부작용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사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프레임이 낳는 이 많은 오해와 편견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현명하게 판단하고 벗어날것인지, 모순되고 왜곡된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옳은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 프레임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단순히 '긍정적이도록 하라'는 메시지 보다도 어떤 프레임을 가져오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 왜곡 현상을 인지하고 깨닫자는데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사실 생활속에서 이 '프레임'이라는 개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이 개념을 쉽게 대입해볼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말하는 '색안경' 이란것도 결국 프레임이라 할 수 있고 무언가를 보고 판단할 때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내가 경험한 데이터베이스를 기준 바탕으로 그것을 파악하고 꿰뚫어보려는 경향이 있는것도, 개인의 경험이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개인의 생각이나 모든 개념 따위를 전부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됐든 삶을 살아가는 데 저마다의 기준이 있기때문에 '프레임'이란걸 완전히 벗어버리고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어느새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진채로 나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 프레임을 다시 '리프레임' 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고 바로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을 인식하고 점검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된다.


부정적 프레임을 갖고있는 사람은 희망속에서도 불행을 찾마내고 긍정 프레임을 갖고있는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을 본다고 했다. 부디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개인의 프레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결코 방해물이 되선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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